[2025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UI의 종말
그래픽=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실내 온도가 적정 수준에 맞춰져 있습니다. 소파에 앉자 저절로 TV가 켜지고, 평소 즐겨 보는 콘텐츠가 나옵니다. 굳이 리모컨으로 가전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AI(인공지능)가 알아서 사용자 의도를 파악한 덕분입니다. 기계와 사람을 이어주는 리모컨이나 가전 버튼 등 ‘유저 인터페이스(UI)’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요. 조선일보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코리아’가 ‘UI의 종말’을 주제로 앞으로 생길 변화를 예측해 봤습니다.
“2026년 어느 날. TV 리모컨이 사라졌다. 모든 앱에서 버튼도 사라졌다. 그런데 TV, 스마트폰 등 전자 기기들이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한다.”
이제 어지간한 사람들도 이런 모습이 더 이상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AI(인공지능)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생긴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명령 없이도 기계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 움직이고 행동한다. 우리가 수십 년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의지해온 리모컨이나 기계 버튼, 아이콘, 클릭, 터치와 같은 ‘유저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이하 UI)’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UI의 종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UI의 역할 변화를 보여주는 몇 가지 변화가 감지된다. 스마트폰, 스마트 TV, 스마트 스피커 등의 디지털 기기에 음성 기반 인터페이스가 빠르게 확산됐으며,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 애플 시리(Siri), 아마존 알렉사(Alexa), 삼성 빅스비(Bixby) 등 주요 플랫폼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또 음성 검색의 일상화 현상도 빨라졌다. 지난해 스마트폰 사용자 중 절반 이상은 하루에 한 번 이상 음성 검색을 사용했다는 통계도 있다. 인간이 점점 더 손가락으로 명령어를 입력하기보다 자연어로 기기와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처음 공개된 ‘아이폰’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UI 시대 종말 준비하는 IT 혁신 주역들
개인용 컴퓨터(PC), 스마트폰 등 IT 역사의 굵직한 혁신은 사람과 기계의 접점, 즉 ’UI의 혁신’이었다. 컴퓨터가 아무리 빨라져도 UI 혁신이 없었다면 코딩을 배우지 않고 컴퓨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UI가 IT 산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계와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기계에 보다 편하게 일 시킬 것인지 고민한 산물이 UI의 혁신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는 메뉴를 만들었고, 버튼을 정렬했으며, 화면에 경로를 설계했다. 인간의 의도를 기계에 어떻게든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AI는 UI 존재 이유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Jony Ive)는 오픈AI와 협력해 아이오 프로덕츠(IO Product)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스크린 없는 새로운 AI 기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아직 그들이 개발 중인 기기 실체가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기존 스마트폰의 시각 중심 사용자 경험에서 벗어나 자연어 중심 또는 AI 기반 상호작용을 지향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흥미롭게도 아이폰을 탄생시키며 ‘버튼’ 시대를 닫고 ‘스크린’ 시대를 연 주역들이 이제는 아예 UI 시대를 닫으려 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이러한 기기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기 어렵다. 여전히 기존 스크린 기반 상호작용이 주는 익숙함의 가치를 능가할 만한 획기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버튼’이 ‘터치’로 바뀔 때는 의도 전달 방식이 유지된 채 형태만 변한 것이다. 그러나 ‘터치’가 ‘말’로 바뀔 때는 사용자의 의도가 전달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말’에서 ‘의도’를 정확하게 추출하려면 그 말을 하는 사용자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
◇흩어져 있는 데이터 연결해 맥락 파악해야
예컨대 AI에게 “주말에 친구와 점심 식사를 위해 여의도 근처 식당을 예약해줘”라고 명령한다고 하자. 사용자는 자신이 선호하는 메뉴가 있고, 조용히 대화하기 좋은 환경, 편리한 주차가 가능한 식당, 주말이니까 너무 이르지 않은 시간에 예약되기를 원할 것이다. 만일 AI가 이런 맥락을 놓치고, 선호하지 않고 시끄러운 식당을 너무 이른 시간에 예약한다면, 사용자는 다시금 과거의 ‘버튼’이 제공했던 명확성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AI 시대 UI 혁신을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사용자의 맥락 정보를 얼마나 잘 수집해 이해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삼성전자는 고도화된 AI를 탑재한 가전과 TV, 스마트폰은 물론 이를 하나로 연결해 맞춤 루틴으로 실행하는 스마트싱스 플랫폼까지 갖추고 있다. 스마트싱스 맞춤 설정으로 서로 연결된 가전들은 유기적으로 작동된다. /삼성전자 제공
문제는 이 맥락이 어딘가에 잘 정리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는 문자 기록에, 일부는 결재 기록에, 일부는 내가 남긴 평점에, 일부는 나의 동선 데이터에 분산되어 저장돼 있다. 컨텍스트(Context)라는 말의 어원처럼, 이들을 함께 ‘모아서(con)’ ‘엮어내야(texere)’ 비로소 맥락으로서 가치가 생긴다. 정보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으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용자 데이터들을 저장하고 있는 서버 사이에 일종의 데이터 연결 채널(API)를 뚫어 정보를 엮어내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데이터의 소유자인 사용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만일 두 서버를 서로 다른 기업이 보유하고 있다면 그들 간의 제휴 또한 필요하다. 어떤 기업이 여러 종류의 서비스를 한 명의 사용자에 대해 동시에 제공하고 있을 경우, 자체 보유한 서비스들 사이에서 사용자 정보를 통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사용자들의 기기상에 저장된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사용자 기기에는 문자, 위치 기록, 통화 기록, 사진 등이 저장돼 있다. 이 접근 방식은 기기 내 데이터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운영체제(OS)나 디바이스 업체(애플, 삼성, 구글 등)에 유리할 수 있다.
◇“특정 기업 유리한 구조로는 성공 어려워”
결국 여러 정보를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특정 기업에만 유리한 구조로는 ‘UI의 종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앤스로픽(Anthropic)이 제시한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MCP, Model Context Protocol)’이 대표적이다. AI 모델이 사용자의 맥락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통합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AI 모델이 다양한 온·오프라인 상의 데이터베이스와 서비스를 일종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도구들이 너무나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AI가 활용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의 작업에 비유하자면, 도구는 많은데 손잡이 자체가 없거나 손잡이마다 형태가 너무 달라서 사용이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서 MCP의 역할은 AI를 위한 ‘표준화된 손잡이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도구 개발자들이 이 표준화된 손잡이 디자인을 적용해 도구를 개발하고, AI 모델 개발자들이 그 표준화된 손잡이의 사용법만 익히면 된다. MCP의 핵심 아이디어가 구현되면 더 이상 운영체제나 디바이스 업체가 아니더라도, 맥락을 이해하고 연결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최근 구글이 발표한 ‘A2A(Agent2Agent)’도 업계에서 주목하는 프로토콜이다. MCP가 특정 AI 모델과 여러 데이터베이스 및 서비스를 연결하는 프로토콜이라면, 구글의 A2A는 여러 AI 에이전트 간 협업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토콜이라는 기술적 차이가 있다.
LG전자가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AWE 2025’에서 아시아 고객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AI 가전, IoT 기술 등을 맞춤형으로 제안하는 공간별 AI 홈 솔루션을 마련했다. (LG전자 제공)
◇오픈AI와 구글이 UI 시대 종말 준비하는 방법
이제 ‘사용자-앱’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작용은 앞으로 ‘사용자-AI-앱’ 간 상호작용으로 재편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AI 시대에 누가 승자가 되느냐다. 오픈 AI, 앤스로픽, 애플, 구글 등 테크 기업들은 승자가 되기 위해 사용자와의 ‘1차 접점’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다. 누가 승자가 될지 예측하기는 아직은 어렵다. 아마도 이 싸움은 사용자들로부터 누가 가장 많은 권한을 위임받는가의 경쟁이 될 것이다. 누가 가장 많은 맥락 데이터를, 가장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의 경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노력으로 이른 시일 내에 터치나 클릭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식당 예약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AI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가 이 정도라면 뭔가 아쉽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그녀(Her)’에서는 대필 작가인 주인공이 2025년 LA에서 AI와 감정적 교감을 나눈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먼 미래의 이야기같이 느껴졌던 상황이, 실제 영화의 배경 시점인 2025년이 된 지금 더 이상 픽션이 아닌 상황이 됐다. AI를 유능한 비서로 만들려는 MCP와 같은 시도, 다른 한편에서는 AI와 사람의 감정적 거리를 좁히고 동반자(Companion)로 만들려는 시도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레플리카 AI(Replika AI)나 워봇(Woebot) 등 AI 기업들은 감정 기반 AI 챗봇을 개발하고 있다. 가상현실 헤드셋 기업 오큘러스(Oculus)의 공동 창립자 브렌던 아이리브가 설립한 세서미AI(Sesame AI)도 보다 인간적인 AI 경험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기만’에도 민감하다는 점이다. ‘가짜인데 진짜인 척’하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다. 구글의 AI 비서 ‘듀플렉스(Duplex)’가 실제 사람인 척 전화 예약을 시도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 대신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후로 구글은 이러한 불편함에 대응하기 위해 듀플렉스가 통화할 때 AI임을 밝히고 통화 내용이 녹음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안을 도입했다. AI에게도 진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AI 시대에 UI 디자이너는 이처럼 미묘한 신뢰의 경계까지 섬세하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되, 사람인 척해서는 안 되는 그 미묘한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5’ 둘째 날인 8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베네시안 엑스포에 마련된 웨이즈 전시관에서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 아미카가 관람객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5.1.9/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AI 알고리즘의 윤리적 역설…‘관계’의 중요성
인간의 사고 능력을 조작하는 AI도 있다. 틱톡과 유튜브 쇼츠가 대표적이다. 이 플랫폼은 사용자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고 싶을 만한 영상을 제공한다. 사용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며, 그것을 ‘좋은 경험’이라고 착각한다. 상업적으로는 성공적인 모델이지만,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흡연자가 담배를 ‘좋다’라고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다. AI가 사용자의 인지 속에 스며드는 순간, 사용자는 ‘조작된 선호’와 ‘자유 의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AI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중독적 편안함은 결국 사용자의 선택권과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 AI 시대에 UI 디자이너들이 당면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AI 확산으로 시각적 직관성과 심미성이 중요했던 시대에서 인지적 직관성과 편안함이 중요한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 그 스크린 안에는 채팅창 하나만 남게 되거나, 스크린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사용자의 맥락을 이해하고, 사용자별로 서로 다른 질문 패턴 등 사고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똑같은 내용을 전달받아도 인간의 감정선과 뉘앙스까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화면’이 아니라 기술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계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 관계가 진정성 있고, 자연스럽고, 간편하고, 투명할수록 사용자는 그 기업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AI 시대에 우리가 설계해야 하는 새로운 UI는 바로 그런 ‘관계’ 자체가 될 것이다.
김경훈 BCG코리아 AI·디지털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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