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1020] 너의>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 미시간주 작은 도시 첼시(Chelsea)에 있는 한 서점의 특별한 이사에 대한 이야기다. 인구수 5400명, 서울로 치면 작은 동 하나의 반의반 정도가 겨우 되는 작은 마을이다. 요즘 세태에 맞지 않게 장사가 제법 잘 된 모양인지 동네서점 세렌디피티 북스(Serendipity Books)는 인근 조금 큰 공간으로 확장이전을 결정했다. 주인장인 미셸 투플린에겐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대단한 인력을 고용하기엔 이사를 가는 거리가 채 100m 남짓 떨어졌을 뿐이고, 그렇다고 자신과 아르바이트생으로만 일을 치르기엔 옮겨야 할 책만 9100권에 달해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투플린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지나갔다. 무거운 책을 잔뜩 이고 지고 옮기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사람들이 늘어서 책을 한 권씩 옮기다 보면 힘들지 않게 일을 마칠 수 있으리란 계산이다. 마침 이사계획을 들은 단골손님들이 도울 일이 없겠느냐고 수차례 물어오기도 했으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투플린은 생각을 정리해 포스터와 전단지, 또 SNS 게시물을 통해 알렸다. 혹시 도움을 줄 사람이 있다면 이삿날 나와 인간컨베이어 벨트를 짓고 책을 옮겨주지 않겠냐는 요청이었다. 누가, 얼마나 호응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없다면 없는 대로 하면 될 일. 투플린은 언론사 인터뷰에서 "플랜B는 없었다"고 답했다.
훈훈해지는 기사, 차가워지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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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결과가 어땠느냐고? 약속된 시간을 30분이나 남겨두고 모여든 이들이 이사할 장소까지 줄지어 늘어서고도 남았다. 계획된 시간이 되자 인간 띠는 두 줄로 늘어설 정도가 됐다. 300명이 넘게 모인 사람들이 손에서 손으로 한 권씩 책을 옮겼다. 9100권에 달하는 책이 장르별로 알파벳별로 완벽히 정리돼 새 서가에 꽂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에 남짓이었다. 주민이 올린 틱톡 게시물이 알고리즘을 타며 전 미국, 나아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보는 동안 위의 해외토픽 사례가 거듭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도 작은 도시와 그곳의 서점이 주요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어져 있지 않고 파편으로만 존재하던 관계들이 어떻게든 닿고 통하며 서로에 기대어 일어서는 순간 또한 담겨 있다. 미국 첼시와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외곽마을의 거리를 건너 실화와 영화 속 이야기는 얼마쯤 닮았고 또 얼마간은 달리 보인다. 그 닮고 다름의 정체가 제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마다 나는 영화 가운데서 첼시의 세렌디피티 북스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 이름처럼 그곳은 그저 운 좋고 이례적인 사례일 뿐이 아닌가 하고.
주인공(에모토 타스쿠 분)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20대 청춘이다. 여러 알바를 전전해온 그는 서점에 정착한 지 제법 된 모양이지만 일에는 영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지각이 일상이요, 일도 설렁설렁,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진심어린 태도를 찾아볼 길 없다. 그렇고 그렇게 사는 흔한 청춘이란 이야기.
주인공에겐 가까이 지내는 친구 시즈오(소메타니 쇼타 분)가 있다. 그와는 전에 다른 알바를 하다 만난 사이로, 방값을 아끼려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다. 말하자면 룸메이트. 시즈오 말고는 서점에서 만나는 동료와 매니저 정도가 고작인데, 대충 일하는 그가 직장 사람들과 각별한 사이일 리 만무하다.
쇠락한 도시, 희망 없는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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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영화는 주인공과 시즈오 사이에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분)가 나타나며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한다. 주인공처럼 서점에서 일하는 알바생 사치코는 단아한 외모에다 싹싹한 성품으로 주변에 호감을 살 만한데, 그녀가 저와는 영 딴판인 주인공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둘은 조금씩 친해져 서로의 비밀이며 내밀한 사정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고는 청춘이 대개 그러하듯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일본 차세대 영화를 이끌 신진기수로 꼽히는 미야케 쇼의 2020년 작이다. 당대 일본 청춘의 면모를 사실적으로 녹여내 마치 한 편의 청춘스케치를 보는 듯하다. 영화가 그린 청춘이란 프리터족, 또 시급루팡, 불성실하여 주변 동려에 민폐를 끼치는 이들 정도로 요약될 수도 있겠는데, 영화의 스케치가 세심하고 정밀한 탓으로 은근히 그 너머의 풍경도 포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 지금 하는 일 말고는 다른 도전을 할 수 없게 된 중년의 비루함과 같은 것. 그로부터 한껏 좁아지고 견고해진 세계관과 인생관, 그렇게 늙어갈 밖에 없는 허망함 같은 것이다. 희망 없는 현실 가운데 발버둥 치다 이내 지쳐 나동그라질 운명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하여 어느 청춘은 진심을 드러내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도, 희구하지도, 열망하지도 않는 이. 그렇다면 누가 그를 일러 청춘이라고 하겠는가.
일본판 '몽상가들', 청춘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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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영화 속 청춘들은 길을 잃고 방황(彷徨)한다. 아니다. 방황이란 말도 적합하지 않다. 헤맬 방(彷)에 헤맬 황(徨)을 쓰는 방황은 이리저리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나돌아다니는 모습을 뜻한다. 말하자면 제 발로 제 노력을 들여 어딘가로 가고 있기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젊음은 어떠한가. 주인공과 시즈오와 사치코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 나는 차마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이들은 방황이 아닌 표류를 하는 탓이다. 나아가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늙고 여위어만 가는 것이다.
책 열 권을 팔아도 한 권 값을 남기지 못하는 서점장사라 했다. 한적하고 앞으로 더욱 한산해질 게 분명한 서점은 하코다테 외곽마을이 그렇듯 조금씩 쇠락이 보이는 듯하다. 기술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고 인간은 늙어 가는데, 미래에도 책의 자리는 있을 것인가. 읽고 쓰는 이들은 남을 수 있을까. 감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내가 본 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아름답게 보고 싶은 욕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이민다. 청춘이란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빛을 발하는 것이거니와, 영화 속 일본만이 아닌 한국에도 비슷한 청춘들이 널려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현실을 폄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생에는 정해진 답이 없고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게 보편적 가치, 적어도 그렇게 다뤄진다는 데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영화 속 청춘스케치도 아름답게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제목처럼 새는 노래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공이 마침내 변화했다 해서, 제 마음을 고백하고 모든 것에 태만한 척하던 가면을 벗는다고 해서 근본적 바뀜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러한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역설적으로 희망 없음을 드러내는 비관을 보이는 듯하다. 영화 속 어디에서도 근본적 변화를, 나아짐을, 회복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의 무대인 도시도, 서점도, 국가와 사회,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맺음 모두가 구석에 처박혀 그대로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 제 마음의 진상을 토로하는 데만도 기적적 계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물며 관계, 체계, 질서, 제도를 일으키는 일은 어떠한가.
어디 아름답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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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포스터 |
ⓒ 디오시네마 |
영화가 전혀 내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들이 사는 세상에 상존하는 중하고 급한 일들이다. 경제와 산업, 정치와 문화, 쇠락하고 무너지는 온갖 것들을 이 영화는 철저히 배제한다. 그 부재로써 존재를 드러낸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건 대부분 어렵고 고단하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일에 매진하는 일을 나는 대단하다 여긴다. 이를 피해 안온하게 사는 걸 현명하다 말하는 낡아버린 늙은이들이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기득권을 틀어쥐고 세상을 갈수록 몹쓸 곳으로, 희망 없는 무엇으로 만들어가는 이들이 어디에나 가득하다.
내가 젊음에 기대하는 게 있다면 어렵고 고단한 무엇과 기꺼이 맞서 귀한 무엇을 이뤄내는 일이다. 잘못 흘러가는 세상의 물줄기를 돌려내고, 쉽지 않은 과업을 이루려는 이를 나는 빛나는 눈길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이를 낭만이라고들 말한다. 그것은 자주 용기와 의로움, 열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젊음이 이와 같은 가치에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혁명과 예술과 저항 가운데에 젊음이 있는 이유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뜨거움이 삭제된 젊음을 그린다. 혁명도 예술도 저항도 없는 도시를, 삶을 보인다. 이곳에선 사랑도 섹스나 발화되지 못한 욕망쯤으로만 남아 있다. 젊은이는 도시에서, 일터에서,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도 격리되고 기생하는 듯 보인다. 그렇게 시시한 무엇으로 늙어가는 것 같다. 이런 삶도 그대로 가치 있는 젊음이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장님보다 더 눈먼 이라 여길 테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수많은 청춘스케치와 선명히 갈라서는 지점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단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며 공동체, 법과 제도, 주류의 것들 따위로부터 완전히 격리돼 어떠한 접촉도, 변화도 도모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다. 그 희망없음이 미야케 쇼가 바라본 일본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청춘영화라기보단 고발영화에 가깝다. 부재로써 말하는 통렬한 고발이다.
2020년 작 영화는 한국 첫 개봉 당시 거의 관객이 들지 않았는데, 그가 한국에서 완전한 무명이었던 탓이다. 그리하여 배급이 얼마 이뤄지지 않은 탓이고, 영화 자체도 관객에게 호소할 만한 선명한 특장점을 얼마 갖추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미야케 쇼는 이후 찍은 두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새벽의 모든>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와일드 투어>에 이어 올해 한국 관객들과 새로이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가 보여준 풍경이 한국에 던지는 울림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건 한국의 관객들 또한 세렌디피티 북스의 사례가 이례적 기적이며 우리 주변에선 벌어지지 않을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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