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관계가 아리송하다. 북한은 최근 세 차례 “일본과 대화에 관심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달 26일 “일본 측과 그 어떤 접촉과 교섭도 외면하고,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인 2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평양 방문을 희망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태도가 돌변했다.
리룡남 주중 북한 대사가 또다시 28일 주중 일본 대사관 관계자 전자우편 접촉 사실을 공개하고, “만날 일이 없다”고 했다. 다음날인 29일에는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는 기시다 총리를 향해 “해결할 것이 없는 문제에 집착하고 고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북·일대화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노동신문뉴스1·AP뉴시스
◆日 향해 “대화 없다”는 北···벼랑 끝 전술 연장선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아함을 넘어 답답함을 느낄 만한 수준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 간에도 지켜야 할 예의와 품위가 있는 데 북한은 이를 깡그리 무시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북한은 대화를 원할 때는 도발을 감행해왔다. 도발과 위협으로 상대국을 압박하고 이를 통해 국면전환에 성공한 뒤 유리한 방향으로 대화 주도권을 잡는 식이다.
이번 북·일 대화에 대한 북한의 최근 몽니도 북한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2018년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성사 과정을 돌아보자. 그 전해인 2017년부터 시작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등 북한 핵·미사일 실험이 정점을 치닫고, 한반도 긴장은 고조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로켓맨(rocket man)’이라고 지칭하며 조롱하기도 했다. 북한도 김 위원장 명의로 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을 미치광이로 표현하기도 했다.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이듬해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면서 극적으로 반전 모멘텀을 찾았다.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업무오찬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北·日대화 최대 걸림돌은 납치자 문제···日언론. “안이한 접근은 역효과” 지적
북·일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은 역시 납치자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북·일 관계 정상화는 요원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일본 정부는 1970∼1980년대 자국민 17명이 북한으로 납치돼 12명이 북한에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12명 중 8명이 사망했고, 4명은 아예 오지 않았다며 해결할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일본 언론보도나 북한의 태도, 기다 총리 언급을 보면 북·일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은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기시다 총리는 4일 보도된 산케이 신문과 인터뷰에서도 북·일 정상회담 실현을 위해 계속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미·일, 한·미·일간 협력도 이어가겠다고 했다. 일본 자민당 내에서는 기시다 총리의 낮은 지지율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정상회담이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기시다 총리도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그러나 낮은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여전히 그의 활동 반경을 제한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 끌려 안이하게 접근한다면 일본 내 여론이 오히려 악화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냉정함이 없는 행동을 하면 문제 해결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한 산케이 신문의 보도는 이같은 우려를 지적한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도쿄=AP뉴시스
2002년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평양선언에 합의했지만 납북자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면서 일본 내 반북 감정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4년 5월 북한을 두 번째 방문했지만, 북한이 보낸 납북 일본인 소녀 요코다 메구미 유골이 가짜로 드러나 양국 관계가 더 나빠졌다.
북한이 일본에 잇따라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 탈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미·일 협력관계 균열을 시도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북·미 대화를 위한 포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쿠바와 전격적으로 수교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 있다.
이우승 기자 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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