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 나의 아버지 박시헌(1937∼1994)
1966년 나의 돌 사진. 이 아이가 자라서 이제 이순(耳順)을 바라본다. 빛바랜 사진 속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은 얼굴이 참으로 애틋하다.
1937년, 소띠 동갑내기인 두 분은 서로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 두 분 나이 마흔셋이던 해 여름 어느 날 새벽, 엄마가 영화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술에 빠져 허우적대던 아버지는 아무 데서나 툭하면 고꾸라지곤 했다.
인천의 한 목재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시골에 혼자 남겨둔 누나가 고등학생이 되어 꼭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자 인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청주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삼 년을 보낸 후,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누나부터 여섯 살짜리 막내까지, 한순간에 모성이 사라져버린 세상 한가운데 내던져진 우리 다섯 남매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 아빠를 보며 서럽고 막막한 날들을 어떻게든 이어가야만 했다. 당신의 아픔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우리는 술주정뱅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아빠가 그저 밉기만 했다.
엄마가 세상을 뜬 지 열여섯 해 되던 해 여름, -당신 마음엔 아비가 없어도 될 만큼 자식들이 컸다고 생각했는지- 오랜 그리움에 지친 아버지는 짧은 편지 하나를 남기고는 백곡 저수지 엄마 무덤 아래서 스스로 깊은 잠이 드셨다. 산자락에 모로 누운 아버지를, 엄마와 같은 계덕이라는 이름의, 산림 감시원이었던 육촌 동생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 나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을 아프게, 불효를 자책하며 견뎌야 했는지. 지난 세월 미움 반 연민 반인 존재로만 남아 있던 아버지를 속으로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온전히 깨달은 건 한참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눈물샘 다 말라버린 아버지/ 혼자 오래 누워 있던 어머니/ 시간과 시간을 포개어/ 이윽고 한 몸이 되었다/ 열여섯 해 만이었다/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산비탈 연둣빛 풀잎들이/ 가느다란 허리로 춤을 춰댔다/ 달빛 켜지는 한밤중이면/ 아버지한테서 어머니한테로/ 흐르는 물소리 찰랑거리고/ 달빛 고봉으로 찬 봉분 속/ 달그락달그락/ 밥숟가락 마주치는 소리 환하다(졸시, 합장(合葬) 전문)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아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기라도 할 때면, 지난날 어떻게라도 술을 못 마시게 해야지 하는 생각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술잔 한 번 채워드린 적 없는 아버지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그 시절 마흔을 갓 넘긴 아버지가 겪었을 바닥 모를 절망과 아픔,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한 사내의 지독한 외로움을 뒤늦게나마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변호사 아들을 꿈꾸던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나를 시인의 길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이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지를, 당신의 아픈 삶과 죽음을 통해 내게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 그때 첫돌이던 당신 손주가 자라 어느덧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요.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날, 이 못난 아들이 당신께 술 한 잔 따라드리며, 아버지의 아픈 속말을 다 들어드릴게요.
박완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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