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권과 대만의 도약] [2] 30대 장관 출신 오드리 탕 인터뷰
오드리 탕 대만 디지털부 장관./게티이미지코리아
대만의 진보 정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 전 대만 총통은 2016년 보수 성향 국민당에서 정권을 되찾자마자 당시 35세였던 ‘시민 해커(프로그래밍 전문가)’ 오드리 탕을 디지털 부문을 총괄하는 장관에 임명했다. 역대 최연소 장관이었다. ‘천재’로 알려졌지만 대학 학위가 없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였다. 민진당 정권은 탕 전 장관을 최고위직에 앉히면서 ‘젊은 정부를 만들고, 다양성을 포용하겠다’는 진보 특유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최근 만난 탕 전 장관은 “나뿐만 아니라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처에도 30대 수장이 있었다. 청년이나 디지털 관련 문제를 다루는 데 70대를 앉힐 순 없지 않느냐”라고 했다.
대만의 30대 디지털 장관인 오드리 탕은 이름난 해커 출신이다. 성공적인 방역에 큰 역할을 한 마스크 재고 앱 프로그래밍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지시가 아니라, 시민의 좋은 아이디어를 증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오드리 탕 flickr
2016년 이후 3연속 집권한 민진당은 변화·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진보 정당의 특성을 정부와 의회에 접목해 역동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차이잉원 정권이 젊은 정부를 꾸리고,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주면서 대만 정치권에선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청년들은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첫 집권의 동력(動力)이었던 ‘민주화 운동’ 집단에 머무는 대신, 때로는 파격적인 새 인재를 영입해 당과 정부를 쇄신해 나갔다. 그 상징적 인물이 탕 전 장관이다.
그래픽=백형선
◇부패한 구세대 운동권 배제… 젊은 전문가로 정치권 세대교체
탕 정 장관은 이런 민진당의 에너지가 청년층에 더 많은 기회를 열었고, 이를 본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책에 참여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제 시민교육 및 시민의식 연구(ICCS) 조사 결과 2022년 대만의 15세 청소년들은 ‘나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들은 단순히 국가나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했다.
탕 전 장관에 따르면 청년들이 대만 정치·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대 간 연대가 더 강해졌다. 그는 “예를 들어 10년 전만 해도 기성 세대는 중국과의 경제 통합을 원했고, 젊은 세대는 이를 단절하려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두 세대가 이 문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내면서 세대 간 소통의 길이 열렸고, 그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2014년 대만에서 청년 주도로 당시 집권당인 국민당의 친중 기조에 반발한 반(反)정부 시위인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탕 전 장관은 시민 해커 단체 ‘g0v(제로 정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정부의 은폐나 불투명한 행정 절차를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이 조직의 목표였다. 그는 시위 현장에 나가 고속 인터넷과 안정적인 무선 네트워크를 설치해 현장 상황을 생중계했다. 해바라기 운동은 국민당이 다음 선거 때 패해 진보 정권인 민진당에 정권을 내준 결정적 계기였다. 민진당은 해바라기 운동을 통해 청년과 기술의 힘을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차이잉원 총통은 정권 출범 초기 30대 중반의 젊은이이자 해바라기 운동으로 이름을 알린 오드리 탕을 내각(무소속 정무위원)으로 불러들였다. 2022년에 디지털부를 신설해 그를 초대 장관으로 앉혔다.
그래픽=백형선
-해바라기 시위는 왜 일어났고 당신은 왜 참여했나.
“직접적인 이유는 둘이었다. 첫째, 중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이 불투명했다. 둘째, 마잉주 전 총통의 인기가 너무 없었다. 그의 지지율이 9%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2400만 국민 중 2000만명은 그가 하는 말을 안 믿었다. 게다가 경제도 안 좋고, 정부가 몇몇 다른 사안도 불투명하게 처리하면서 시민 운동이 확산했다. 나는 실시간 방송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시위 현장에서 인터넷 연결을 지원했다.”
-해바라기 운동 이후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세대 간 갈등이 줄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더 다채롭고 포용적인 사회가 됐다. 차이잉원 정권이 들어선 뒤 대만에는 수화를 포함해 20개의 국가 공용어가 새로 지정됐다. 과거에는 중국어(만다린)와 일부 타이완어(호끼엔)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객가어(하카), 원주민 언어, 일부 이민자의 언어도 존중받고 있다.”
작년 '해바라기 운동 10주년' 기념하는 시민들 - 지난해 3월 18일 대만 타이베이 입법원(국회) 건물 밖에서 시민들이 해바라기와 피켓을 들고 '해바라기 운동' 1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해바라기 운동'은 2014년 보수 성향 국민당 정권이 중국과 체결한 '양안 서비스무역협정'을 졸속 통과시키려 하자 이에 항의해 벌인 청년들의 시위를 가리킨다. 대만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EPA 연합뉴스
-이민자 언어가 공용어가 될 필요까지 있었나.
“10년 전만 해도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에 대해선 불안감이 있었다. 지금은 이러한 다양성이 사회적 강점으로 여겨진다. 대만 거주권을 얻기 위한 문은 점점 넓히고 있다. 위키피디아·깃허브·유튜브 등 글로벌 테크 기업에 8년 이상 기여한 기록이 있다면, ‘골드 카드’를 받을 수 있다. 거주권뿐만 아니라 의료 혜택까지 제공하는 자격 증명서다. 대만은 이런 사람에게 시민권·투표권까지 주진 않지만 전자 청원(e-petitions) 등을 통해 민주주의 시스템에 참여할 길을 열어놓았다. 이주자나 이민자들에게 정치적 권리는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대만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중간 지점을 찾은 것이다.”
2000년 민진당 출신으로 대만 첫 총통에 올랐던 천수이볜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면서 정계에 이름을 알렸다.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이른바 ‘86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대만 ‘운동권 정치인’들의 엘리트 코스였다. 그러나 천 전 총통이 임기 직후 부패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이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자랐다. 민진당은 ‘민주화 운동’의 향수(鄕愁)에 머물러서는 2008년 국민당에 다시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어렵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새 인재를 영입하며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8년 후 정권을 되찾고 대만을 ‘신기술 중심지’로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전 총통은 운동권과 거리가 먼 해외 유학파 출신 엘리트다. 정계 입문 전 교수와 관료를 지냈다. 지난해 정권을 물려받은 의사 출신 라이칭더도 강성 진보로 분류되지만 운동권과는 무관하다.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며 세대교체를 해온 민진당의 노력을 계승한 조직이 탕 전 장관이 이끌었던 내각 내 ‘청년 자문위원회’였다. 35세 미만 청년 25명이 정책 조언을 하도록 한 제도다.
-이 위원회는 어떻게 작동했나.
“청년 위원들이 제안한 정책을 정부 부처가 실행할 수 있는지 검토했고, 이를 행정원(내각)이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정책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2019년엔 세계 기능 올림픽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동일한 혜택을 주자는 안건이 나왔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기술자이니, 이들이 거기에 걸맞은 사회적 대우를 받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이 제안은 결국 정책으로 만들어졌고 직업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위원회를 통해 ‘생리 박물관’을 타이베이에 설립하고, 공공장소에 탐폰·생리대를 비치하도록 만든 사례도 있었다. 이런 변화는 대만 젊은이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줬다. ‘청년층이 변화를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정책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만든 것이다.”
-대만 청년은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가.
“대만의 변화를 불러온 주요 운동은 대부분 젊은 세대가 주도했다. 젊은 사람들이 항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해바라기 운동’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주도했고, 이듬해 일어난 2015년 교과과정 개정 반대 운동(국민당 마잉주 정권이 친중 성향으로 교과과정을 개정하려고 시도하자 반대해 후퇴시킨 운동) 때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됐다.”
탕 전 장관은 지능지수(IQ)가 180으로 알려졌다. 그는 학교에 적응을 못 해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니다가 14세에 중퇴했다. 16세에 첫 창업을 했고, 19세에 미국 실리콘밸리로 가서 검색 엔진 회사를 세웠다. 이후 애플·벤큐 등 유명 테크 기업에서 고문을 맡으며 시민 해커로도 활동했다.
-당신의 공식 학력은 중졸인데, 정부에서 일할 때 문제가 된 적은 없나.
“대만엔 굉장히 활발하게 ‘실험 교육’이 확산하고 있다. 학생 약 10%가 가정·기관 혹은 대체 실험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단순히 ‘중퇴자’로 취급받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배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여겨진다. 한국에서도 홈스쿨링을 할 수는 있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법이 없는 것으로 안다. 대만에선 홈스쿨링이나 대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교육과정이 심사위원단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대만 청년들의 강점이라면.
“대만의 국내총생산(GDP)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보통신기술 수출이고, 대만 경제는 국제적 연결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대만의 젊은 세대는 국내 문제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트렌드와 기술을 배우고 그걸 대만 사회에 적용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많고 글로벌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한다는 점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차이라고 생각한다.”
☞해바라기(太陽花) 운동
2014년 대만 청년들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 당시 친중 성향 국민당 정권이 중국과 체결한 양안 서비스무역협정(CSSTA)을 국회 심의 없이 통과시키려 하자, 대학생과 시민들이 국회를 점거하며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 초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해바라기 꽃을 주며 응원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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