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461] 영화 브레이킹>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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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안소니 첸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것은 <일로 일로>(2013)를 통해서였다.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 테레사와 싱가포르 소년 자러의 이해와 관계에 대해 그렸던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이 관계성에 대해 정확히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하나의 단일한 표현으로 뭉치기 위해서는 연속성이 필요한 법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그런 일관된 모습이 분명히 있었다. <웻 시즌>(2019)에는 보여줬던 말레이시아 교사 링과 싱가포르 학생 웨이룬 사이의 유대감이 있었고, <드리프트>(2022)에는 라이베리아 출신의 난민 재클린과 표류한 미국 여행 가이드 사이의 우정이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 속에 '연대'에 대한 가능성과 믿음이 놓여 있다고. 이번 작품 <브레이킹 아이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연길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나나(주동우 분)는 자신의 버스에 올라탄 남자 하오펑(류호연 분)을 만나게 된다. 혼자 겉도는 남자가 어쩐지 계속 눈에 밟히던 그가 타지에서 휴대전화마저 잃어버리게 되자 친구 샤오(굴초소 분)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 밤새 술을 마신 세 사람. 다음 날 아침, 하오펑은 상하이로 향하는 비행기마저 놓쳐버리고 세 사람은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각자의 세계에 균열이 조금씩 일기 시작한다.
02.
"하오펑, 넌 친구야 관광객이야?"
오토바이를 탄 세 사람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인 연길의 국경선까지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초반부의 장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량하면서도 차갑게 얼어붙은 두만강의 모습이 세 사람의 내면을 투영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장면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극 전체의 경계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이 장면 전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세 인물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어울리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하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결과에 해당하고, 또 하나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시작에 속한다. 어느 쪽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모호한 두 지점을 두만강 인근에서 세 사람이 보낸 시간이 느슨하지만, 강한 어조로 묶어낸다. 세 사람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짙은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또한 그 과정에서 안소니 첸 감독이 말해왔던 '연대'의 그림자를 이번에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이 장면 이전에 주어지는 것들이 하나의 물음에 대한 것이라면, 이후에 그려지는 것은 물음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들이 될 테다. 해답까지는 닿지 못할지언정 그렇다. 나나가 하오펑에게 친구인지 관광객인지 묻는 이 물음이 결코 간단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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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03.
극 중 세 사람의 관계가 얕고 즉흥적이다. 조금 전의 질문을 다시 가져오자면, 친구라기엔 멀고 관광객이라기엔 가깝다.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얼음과도 유사하다. 빠르게 가까워지고(얼고), 또 빠르게 멀어진다(녹는다). 실제로 세 사람은 각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 어쩌다 튀어나온 상대방의 솔직한 마음에도 '별거 아니'라는 식의 형식적인 대꾸만 할 뿐이다. 물론 영화는 관객의 이해를 위해 각자의 문제에 대한 플롯을 마련한다. 하오펑에게 걸려 오는 상담센터의 전화, 수소문 끝에 나나를 찾아오는 동료, 그리고 식당에 갇힌 샤오의 모습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장면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혼자가 된다.
연길이라는 도시는 그렇게 그려진다. 어떤 삶이 처음 시작된 자리가 아니라 떠나오거나 도망쳐 온 장소. 새로운 감정을 싹틔우거나 안고 나아갈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순간에 발이 묶인 채로 맴돌게 되는 공간.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오펑과 사랑을 나누던 나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슬픔을 삼킨다. 하오펑 역시 녹아내리는 얼음 뒤에 숨어 눈물을 흘린다. 샤오는 언제나 돌아서는 인물이다. 마음을 잃은 청춘들의 모습이 여기에서 그려져야만 했던 것은 인구의 다수가 조선족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국경에는 보이지 않는 너머의 마음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극적인 관계성의 시도가 아닌 느슨함.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속 세 청춘은 분명히 서로 맞닿아 있지만 현재를 공유하고 함께 보내는 것 정도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 나이 먹도록 다른 세상은 알지도 못한 채 좁고 낡은 식당에만 머물며 일해 온 샤오, 어머니의 강요로 평생 공부만 해왔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한 하오펑, 그리고 큰 사고로 유망했던 미래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나나까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두 아직까지 자신의 일조차 제대로 끌어안지 못하고 있으니까.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위태로운 현실 위에 놓인 불안한 현재'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04.
"모든 걸 끝내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한편, 이 작품 속에는 영화 전반에 걸쳐 공개 수배된 한 남성의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제시되고 있다. 세 사람의 입으로 직접 언급되는 것은 후반부의 장면에 이르러서다. 함께 식사를 나누던 중 샤오는 술에 취한 상태로 공개 수배된 범죄자에 대해 그의 현상금이 자신이 평생 벌어들인 돈보다 훨씬 많다고 말한다. 이전에도 몇 차례 해당 남성에 대한 단서는 지속적으로 주어진다. 물건을 훔쳐 달아난 남자의 인상착의 등에 대해 뉴스 속에서 다루어지는 등의 장면을 통해서다. 하지만 샤오는 이어지는 신에서 식당 밖을 서성거리는 수상한 남성을 목격하게 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가 수배된 범죄자인지는 알 수 없다.) 세 사람이 아직 백두산을 오르기 전의 시점, 아직은 그럴만한 때다.
'아직 그럴만한 때'라고 말한 것은 극 중 세 사람 모두의 심리가 해당 인물인 범죄자에게 상징적으로 투영되고 있어서다.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치료하기보다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하오펑과 과거의 사고로 인한 후회와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버린 나나가 그렇다. 현재의 모습에 대한 불만과 변화에의 갈망을 느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샤오 또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공개 수배된 남성은 이들 모두가 보이는 회피성과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유령과도 같다.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안소니 첸 감독의 연대에 대한 시선, 이번 작품에서의 느슨하면서도 단단한 연대는 이 떠도는 유령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가능해짐을 알 수 있다.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 이전에, 자기 발견과 성장을 통해 직시하고 마주하는 태도를 먼저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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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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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백두산으로 향하는 세 사람의 마지막 동행, 그 길 위에서 공유하게 되는 웅녀 설화는 그 용기를 얻기 위한 과정과도 같다. 백일을 참고 기다려 사람이 되었다는 웅녀의 환골탈태가 이들 모두가 이루어내야 할 성장 과정과 비유되는 것이다.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한 번의 산행으로 없던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심지어 세 사람은 거센 눈보라로 인해 천지 바로 아래에서 발길을 되돌려 하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샤오펑은 다시 한번 자살을 떠올리게 되는데, 다른 두 사람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동행, 연대, 우정, 만남, 동병상련. 어떤 단어로 불러도 좋다. 어떤 이유로든 서로 함께였기에 영화의 마지막 자리까지 모두 나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나는 한쪽에 밀어두었던 박스를 열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샤오는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오래 머물렀던 연길을 떠난다. 샤오펑만은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은 대구를 이루어야 옳다. 시작이 얼어붙어 있던 삶이라면, 마지막은 녹아야 할 차례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흔들리고 만다. 이 영화에서 흔들리는 것은 세 사람의 연길 속 시간으로 충분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 나나가 하오펑에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야겠다. 친구인지 관광객인지 묻던 장면이다. 두 사람은, 아니 세 사람은 서로를 어떤 관계로 여겼던 것일까. 하오펑의 내일에 대해 영화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 물음을 스스로 갈무리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모두의 내일을 생각하면 역시 이 질문은 쉽지 않고, 또 어떤 대답을 따르게 되느냐에 따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될 것이므로. 내게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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