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베어스 이승엽 감독 photo 뉴시스
"4위, 5위 하려고 야구하는 게 아니다."
지난 3월 두산 베어스 구단주 박정원 회장이 일본 미야자키 스프링캠프를 방문했을 때 했다는 말이다. 2025시즌의 3분의1을 통과한 5월 27일 현재, 두산은 52경기 21승 3무 28패 승률 0.429로 전체 9위에 그치면서 구단주의 요구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수행하는 중이다. 구단주는 4위, 5위 하지 말자고 했지 9위를 하라고 한 적은 없다. 2부리그 팀 키움 히어로즈(승률 0.255)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꼴찌도 가능한 성적이다. 기대승률로 계산하는 가을야구 진출 확률은 16.7%(출처: PSODDS.com)까지 떨어졌다.
두산의 부진은 선수단의 면면이나 개인 기록만 봐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류선규 전 SSG 단장의 저서 '야구X수학'에 따르면 올시즌 두산 선수단 WAR(대체선수대비 기여승수) 상위 30명의 합계는 49.61승으로 삼성, LG, KIA에 이은 전체 4위였다. 상위 40명 합계도 49.46승으로 역시 4위다. 멤버만 보면 적어도 4위는 하고 있어야 할 전력이란 얘기다. 득실점으로 구하는 기대승률도 0.481로 실제 승률(0.429)보다 훨씬 높다. 가진 전력의 합이 경기장에서 성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류 전 단장은 "두산은 선수가 없는 게 아닌데 구슬을 제대로 꿰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한 야구인은 "두산이 12연승을 달린 한화전 3연승, 1위 LG 상대로도 2승을 거뒀다. 그런 걸 보면 분명 저력이 있는 것 같은데, 단순히 전력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엽 향한 비판 최고조
지하를 뚫고 내려간 성적 부진에 두산 팬들 사이에선 이승엽 감독을 향한 비판이 최고조에 달한 분위기다. 이 감독은 이미 취임 첫 시즌인 2023년 시즌 최종전에서 홈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는 충격을 경험했다. '국민타자'이자 '베이징의 영웅'으로 전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성공적 야구 커리어를 쌓아온 이 감독에겐 난생처음 겪는 굴욕이었을 거다. 직전 시즌 9위였던 팀을 맡아서 5위로 가을야구까지 이끌었지만 팬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지난해에도 정규시즌 4위로 2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했지만, 관중석에서 나온 구호는 "이승엽 나가!"였다. 이처럼 여론이 험악한 상황에서 맞이한 3년 계약 마지막 시즌마저 초반 하위권으로 추락하자 팬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 이승엽 감독을 겨냥한 온갖 조롱성 밈이 넘쳐나고, 각종 커뮤니티엔 이 감독 경질 '썰'이 수시로 올라온다.
팬들의 험악한 여론과 달리 야구인들 사이에선 이 감독을 동정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한 야구인은 "만약 이 감독이 맡은 팀이 두산이 아니라 현역 시절 소속팀인 삼성이었다면, 지금처럼 비난받았을까?"라고 반문했다. 구단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 감독이 되면 선수 시절부터 응원했던 팬들의 지지가 여론의 보호막을 형성한다. 다소 기대에 못 미치거나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어도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두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감독을 바라보는 팬들의 기준은 보다 냉정할 수밖에 없다. 부임 때부터 불리한 여론 지형에서 팀을 지휘한 셈이다. 이 감독과 현역 시절 한 팀에서 활약했던 선배 야구인은 "어쨌든 2년 연속 팀을 가을야구로 간 것 아닌가. 전년도 9위 전력으로, 외국인 투수가 둘 다 나가떨어진 상황에서 5강 갔다. 작년에도 마약 사범(오재원) 때문에 1군 멤버 여럿이 경기에 못 나오는 악조건 속에서 4위를 했다"고 두둔했다. 이어 "물론 팬들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같은 수준의 비난을 받을 정도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4, 5위 하려고 야구하는 게 아니라는 구단주의 말은 노골적인 우승 주문이다. 이 감독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불리한 여론 속에 사면초가에 몰린 감독은 여유가 없다. 조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경기 운영으로 나타난다. 시즌 초반 4연투를 강행한 좌완 김호준 기용이 대표적이다. 김호준은 나흘째 등판에서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2안타 1실점한 뒤 강판됐다. 마무리 김택연을 8회에 기용하는 일도 유독 잦아졌다. 지난 4월 26일 잠실 롯데전에선 8회 무사 3루 동점 상황에 김택연을 투입했다. 무사 3루는 전성기 선동열, 오승환도 막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5월 25일 NC전에선 8회 1사에서 기용해 5아웃을 맡겼다. 김택연은 리그 마무리투수 중 가장 많은 7번의 멀티이닝을 소화하고 있다. 작년 데뷔 시즌부터 무리한 여파인지, 올해는 눈에 띄게 구위가 떨어진 모습이다. 작년 리그 최다등판 투수 이병헌은 올 시즌 컨디션 난조로 2군에 머물고 있다. 급하다고 카드론, 현금서비스를 남발하면 파산을 못 면한다.
'독한 야구'가 주로 불펜투수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한 야구인은 "작전, 선수 기용 등에서 단호할 때는 단호한 면이 필요한데, 이 감독의 성정상 주전 선수들에게 냉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에 허덕인 주전 야수들은 감독의 믿음과 지지 속에 계속해서 1군 기회를 받았다. 두산 출신 한 지도자는 "거액의 몸값을 받는 두산 베테랑들이 좀 더 이타적이고 팀을 위하는 플레이를 해야 한다. 두산은 찬스에서 병살타나 삼진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다른 감독 같으면 바로 교체했을 것"이라며 "감독이 기회를 주고 배려하는 만큼, 뭐라도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데 두산은 너무 느슨한 분위기"라고 꼬집었다.
손발 맞출 코치진 대부분 경질
이승엽 감독은 외롭다. 함께 손발을 맞추고, 속내를 털어놓았던 코치진 대부분이 경질당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감독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코치진의 도움이 필요한데 현재의 코치진 구성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두산 사정에 밝은 야구인은 "작년 부임한 새 대표이사가 전임 사장에 비해 굉장히 적극적인 스타일이다. 구단주의 측근으로 알려졌는데, 부임하자마자 팀의 여러 부면에 앞장서서 나서고 있다"면서 "지난 시즌 뒤 대대적인 프런트, 코치 숙청도 그 여파"라고 했다. 전언에 따르면 사장에게 왜곡된 보고를 올리는 모 부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김태룡 단장의 입지가 전보다 좁아졌다는 말도 나온다.
두산 출신 야구 원로는 "야구인 출신 김 단장과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는 프런트가 두산의 강점인데, 지금은 그 장점이 사라졌다. 야구를 모르는 경영자가 너무 나서면 팀이 산으로 간다. 감독의 영역이나 경기 운영에 대해 구단 내에서 소음이 많다 보니 감독으로선 괴로운 상황일 것"이라고 했다. 이 원로는 "구단 고위층이 현장에 불필요한 간섭은 자제하고 감독이 소신껏 야구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소홀했던 팀 전력 보강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구단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팬들의 기대와 달리 두산의 초반 부진이 이 감독의 조기 경질로 이어질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시즌 초반이고 반등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에서 감독 거취를 논하기는 이르다는 게 구단 안팎에서 나오는 예상이다. 두산 출신 야구인은 "두산 구단주는 의리도 있고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지금 당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감독을 내칠 분은 아니다"라고 내다봤다.
이택근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두산은 앞으로 시즌을 치르면서 올라갈 여력이 충분한 팀"이라며 "에이스 곽빈이 돌아오고 불펜투수 홍건희가 돌아오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했다. 류선규 전 단장도 "순위표가 4위부터 9위까지는 혼전 양상이다. 앞의 팀들이 아주 멀리 있는 건 아니라서 충분히 해볼 만하다.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는 5월 말이 승부처"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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