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의 ‘한국형 AI’, 金의 100조원…
20년 전 낡은 실패담 떠올라
비현실적 양적 투입에만 골몰
제대로 된 전략이 보고 싶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12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 인근 미팅룸에서 열린 IT 개발자들과의 'K-혁신' 브라운백 미팅에서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2000년대는 각종 ‘한국형’ IT 기술의 전성시대였다. 컴퓨터 운영체제(OS)나 휴대용 게임기 개발이 시도되고, 정부 주도로 진행된 와이브로(차세대 이동통신 기술·WiBro), 위피(휴대폰 인터넷 플랫폼·WIPI) 같은 굵직한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다. 국산 수입 대체품은 쓰려는 사람이 없었다. 와이브로는 국제 표준 경쟁에 밀려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위피는 휴대폰 생태계를 외딴섬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기술력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많은 이용자와 기업을 끌어들여야 하는 분야에서, 그저 ‘열심히 기술을 만들면 된다’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자본과 인력을 집중 투입하면 됐던 추격형 성장 전략의 관성이 낳은 참사였다.
주요 대선 후보들의 AI 공약을 보니 ‘한국형’ IT들의 낡은 실패담이 떠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달 중순 사실상의 첫 대선 공약으로 정부 주도 ‘한국형 챗GPT’를 만들겠다며 20여 년 전 유행했던 논리를 답습했다. 이 후보는 “전 국민이 사용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수많은 데이터를 쌓을 수 있습니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 모두가 선진국 수준의 AI를 무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며 기본사회를 얹은 것 정도만 다르다.
다른 후보들도 피차일반이다. 100조원 투자, 20만명 전문 인력 양성을 내세운 김문수 후보처럼 비현실적인 투입 일변도다. 이 후보 역시 숫자는 100조원이다.2023년 연구개발 투자는 정부와 민간을 모두 합쳐 119조원이다. 국내총생산(GDP)의 5.0%다.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6.3%)뿐이고 미국·일본·독일 같은 나라는 3%대다. 인력도 마찬가지다. 전일제 근무 기준 연구원(FTE)은 49만명으로 취업자 1000명당 17.3명꼴이다. 프랑스(11.5명), 미국(10.6명)을 앞선 세계 1위다.
한국은 이미 연구개발에 전력을 다하는 나라다. 단순한 양적 확장이 추가 효과를 낼 가능성은 낮다. 초중등 교육부터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인력 공급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이 2.4%에 불과하던 2004년에나 통했을 ‘100조원 투자’ 공약은 시대착오적이다. 한덕수 전 총리는 60년대 몇 안 됐던 유학파를 돌아오게 하려고 주택을 줬던 정책을 되살려오기도 했다.
게다가 연구개발 투자의 78.6%는 민간 기업이 담당한다. 이재명 후보가 정부가 지분 30%를 소유한 AI 거대 기업 이야기를 꺼내 논란을 자초한 건, 민간이 주도하는 판에 정부가 공격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공기업을 만드는 것 이외에 뾰족한 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민간 역할을 강조하는 이준석 후보도 뚜렷한 청사진이 없는 건 매한가지다.
1990년대 초·중반 얼윈 영, 폴 크루그먼 등 경제학자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생산성 향상 없이 자본이나 노동을 집중 투입한 결과라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들의 지적은 IMF 외환 위기로 현실화됐다. 대선 후보들의 AI 공약을 보면서 불안한 건 정부 주도로 생산 요소 투입을 늘리는 데 골몰했던 당시 한국의 모습과 판박이라서다. 산업과 연구개발의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 AI 시대에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분야는 어디에 있을지 고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어떻게 제대로 투자할 것인가’다. 어떤 전략으로 AI 분야의 수퍼스타 기업을 만들어낼 것인지, 기존 기업들의 적응과 변화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그리고 변화에 뒤처질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 교육, 과학기술 정책을 긴밀하게 엮은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이 너무나 쉰내 나는 정책 대신, 새로운 성장 전략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이유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5분 칼럼'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