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생명의 시작을 찾아… ‘마이크로 라이트닝’ 가설 눈길
원시 지구의 바다서 파도 칠 때
물방울 튀어 오르며 ‘방전’ 발생
크기에 따라 다른 전하 갖게 돼
미세한 번개로‘무기물→유기물’
글리신 등 아미노산으로 합성돼
점점 복잡해지면서 세포로 진화
게티이미지뱅크
우리 인류의 과거, 더 나아가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간 과학계에선 생명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수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비밀이 완전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다수 학설은 원시 지구에서 무기물이 유기물로 합성되는 화학 변화를 그 시작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기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초기 지구의 바다에서 각종 조건이 겹치며 단순한 유기물이 합성되고, 더 복잡해지고 세포로 진화하며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했다는 이론이다.
1952년 진행된 밀러-유리 실험은 이 가능성을 실험실에서 구현한 기념비적인 연구로 여겨진다. 원시 지구의 바다에 번개가 치면서 유기물이 합성됐다는 가설은 생명과학계의 큰 업적으로 남았지만, 바닷물의 양에 비해 번개는 너무 미약하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돼왔다. 그런데 최근 과학계에서 이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연구가 발표됐다. 물방울끼리 부딪히며 발생하는 작은 스파크가 유기물 합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노산 합성한 밀러-유리 실험 = 1952년,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생 스탠리 밀러와 그의 지도교수 해럴드 유리는 생명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역사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이른바 ‘밀러-유리 실험’이다. 밀러는 원시 지구의 대기가 메탄(CH₄), 암모니아(NH₃), 수소(H₂), 수증기(H₂O) 등 환원성 기체로 구성돼 있었을 것이라 가정했다. 여기에 번개와 같은 에너지원이 작용하면 생명의 기본 재료인 아미노산이 생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실험의 토대였다. 이들은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실험 용기에 해당 기체들을 주입해 원시 지구로 추정되는 환경을 조성하고, 고전압 전기 스파크를 가해 수일간 반응을 유도했다. 그 결과, 밀러와 유리는 실험 용기 안의 투명한 물이 붉은빛의 탁한 용액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글리신, 알라닌 등 가장 간단한 형태의 아미노산 여러 종을 확인했다. 이 실험은 “생명은 신의 섭리가 아닌 물리·화학적 과정의 산물일 수 있다”는 파격적인 시사점을 던지며, 현대 생명기원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밀러는 이 업적으로 국제 생명 기원 연구학회로부터 생명 기원 분야에서 최고의 상으로 꼽히는 오파린 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현재, 과학계에서는 밀러-유리 실험의 한계점도 함께 주목하고 있다. 당시 구현한 원시 지구의 환경은 어디까지나 검증되지 않은 가정이었고, 실험 과정에서 전기 스파크로 번개를 모사했지만 과연 번개가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했느냐는 의문이다. 작은 실험 용기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전기 스파크와 달리, 지구 전체 규모에서 번개는 지극히 작은 현상이다. 또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했는지도 미지수다. 넓고 깊은 바다에 떨어진 작은 번개가 생명의 기원이라고 보기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방울 사이 ‘미세 스파크’가 답? = 지난 3월, 스탠퍼드대의 리처드 자레 교수 연구팀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튀어 오른 작은 물방울 사이에 미세한 스파크가 발생하면서 화학반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이 같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마이크로 라이트닝’(microlightning)이라는 비유적 설명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밀러-유리 실험과 유사하게 실험 용기 안에 메탄, 질소(N₂), 이산화탄소(CO2), 암모니아(NH₃)가 혼합된 원시 지구의 대기 환경을 구현했다. 그리고 이 환경에 순수한 물을 분사했다. 그 결과, 인위적인 스파크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안화수소(HCN), 포름알데히드(CH₂O) 등 유기 분자가 합성됐다. 이는 글리신 등 본격적인 아미노산 합성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구성요소가 반드시 대규모 번개와 같은 에너지원이 아닌, 자연적인 미세 물리 현상만으로도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물이 미세한 방울 형태로 분사되는 과정에서 전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에 따르면 미세한 물방울이 공기 중으로 튈 때, 큰 물방울은 양전하(+), 작은 물방울은 음전하(-)를 띠게 된다. 이 물방울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전하를 가진 물방울 사이 전기 방전이 일어나며 빛이 발생하는데 아주 작은 번개, 즉 마이크로 라이트닝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즉 원시 지구의 바다에 번개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해안의 바위 틈새 등 자연적인 환경에 파도가 부딪히며 발생한 미세 물방울들이 서로 스파크를 일으켜 생명의 씨앗을 만들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생명의 기원 찾는 또 다른 이론들 = 밀러-유리 실험과 이를 보완한 자레 교수의 마이크로 라이트닝은 모두 원시 지구 바다에 녹아 있던 물질들이 화학적으로 반응해 생명이 발생했다는 ‘원시수프’ 이론에 기반한다. 밀러-유리 실험과 자레 교수팀의 연구 외에도, 원시수프 이론을 바탕으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여러 가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심해 열수구 가설이다. 이 이론은 바닷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에 의해 뜨거워진 물이 분출되는 과정에서 복잡한 유기물이 생성됐다는 주장이다. 현재 생명과학계에서 아주 유력한 가설로 평가받는 이 이론에 따르면, 초기 유기물들은 심해 열수구 주위의 황철석 표면에서 황철석의 촉매작용에 의해 생성됐으며, 대부분의 화학적 진화가 이곳에 축적된 유기물층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열수구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생물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나, 열수구 내부에서 원시 지구 환경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호열성 메탄생성균이 발견된다는 점 등은 이런 가설에 설득력을 더한다.
또는 지구가 아닌 우주로부터 날아온 ‘이주민’일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원시 지구에 유기물이 풍부한 운석이 다량으로 충돌하면서 외부로부터 유입됐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일본의 탐사선 하야부사2호가 지구로 가져온 소행성 ‘류구’의 시료에선 20여 종의 아미노산이 검출됐고, 미국의 탐사선 오시리스-렉스(Osiris-Rex)가 가져온 소행성 ‘베누’의 시료에서도 다양한 유기화합물이 확인되며 외계기원설에 힘을 실었다.
구혁 기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