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해피엔드>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 청소년은 출입이 제한된 전자음악 클럽 입구를 서성인다. 직원에게 가로막히지만, 관계자 전용문으로 몰래 들어간 친구 '유타'와 '코우'는 막 시작된 디제이 공연에 열광하며 빠져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찰의 일제 단속에 미성년자인 둘은 붙들린다. 코우는 도망칠 기회가 있었지만, 음악에 심취한 유타 탓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유타는 얼른 집에 귀가하라며 훈방 처리되지만, 재일조선인 4세인 코우는 휴대 의무가 없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당한다.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
다행히 친구들의 도움으로 현장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그들은 자신들의 아지트인 학교 동아리방에 잠입해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마침 교장의 스포츠카가 교내에 주차되어 있었다. 평소에 교장을 아니꼽게 보던 둘은 차량에 장난을 치기로 한다. 그들의 장난은 아침부터 학교를 뒤흔들고, 노발대발한 교장은 학교에 실시간 인공지능 감시체계를 도입한다. 안면 인식 기술과 결합한 시스템으로 인해 그들의 학교생활은 통제로 얼룩지기 시작한다.
한편, 근미래 일본은 다시금 대지진의 전조에 휘말린 상태다. 수시로 지진 예보가 뜨고, 대피 연습에 분주하다. 천재지변 위협을 이유로 총리는 국가적 긴급상황에 비상대권을 강화하는 법안을 밀어붙인다. 사회는 찬반으로 나뉘어 갈등이 커진다. 혼란한 세상과 무관하게 유타와 코우, 아타와 밍, 톰 다섯 동아리 친구는 얼마 남지 않은 청소년 시절을 그저 즐겁게 보내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본의 현재와 무관할 수 없다. 스포츠카 장난의 범인으로 유타와 코우를 의심하던 학교는 그들의 기지와도 같은 동아리방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코우는 그런 탄압과 갈수록 짙어지는 차별에 분노하며 학교에 맞서는 '후미'와 가까워지지만, 유타는 그저 소꿉친구들과 즐겁게 음악 활동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영혼의 단짝처럼 환상의 콤비이던 두 친구는 조금씩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일본 근현대사의 어둠을 환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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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스틸 |
ⓒ 영화사 진진 |
<해피엔드>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현실 일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명백하게 SF 문법을 활용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해당 장르를 연상할 때 떠올리는 비현실적인 시각 효과 대신에 현실 세계를 적절히 비틀면서 풍자와 은유를 극대화하는 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스타일이 확고하다. 이는 멀게는 <걸리버 여행기>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이다.
영화 속 근미래 일본 묘사는 어떤 의미일까? 주변국에서 염려하는 우경화 심화가 한층 더 가속화된 풍경이다. 아베 신조를 연상케 하는 신임 일본 총리는 '안보'를 내세워 국가 비상사태에 권력 집중과 예방조치 권한을 정당화한다. 기자회견 중에 일어난 항의성 피습에 마치 트럼프가 그랬던 것처럼 의연하게 행세하는 점도 현실 권위주의 정치가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한다. 정치적 행위의 세밀한 함의보다 겉으로 보이는 일거수일투족에만 치우치는 미디어의 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100~150년마다 일본을 강타해 온 대지진의 위협은 정부가 노리는 통제 강화의 가장 큰 명분이다. 물론 국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게 겉으로 표방하는 목표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규제와 감시가 확장하는 걸 정당화하는 태도를 의심하는 이가 적지 않다. 거리에선 찬반 시위가 충돌하고, 공권력은 현재 일본 정부가 흔히 보이듯 편파적으로 일관한다. 공공연하게 정부는 이른바 '비국민'이 대지진을 틈타 치안 불안과 범죄의 온상이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데에도 여념이 없다. 한국 관객이라면 금방 1923년 관동대지진과 뒤이은 조선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코우는 세상의 험악한 공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식당을 꾸리며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지만, 어느새 가게 입구엔 가슴 철렁하게 '비국민' 낙서가 휘갈겨 있다. 단짝 유타와 밤거리를 쏘다니다 불심 검문을 받으면, 늘 그만 체류 자격증 시비에 휘말린다. 후미와 가까워지며 시위에도 가보고, 일상에서 가중되는 차별을 겪으며 코우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며 열심히 공부하던 일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늘 해외 출장에 바쁜 어머니 덕분에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는 유타는 친구가 겪는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세상 바뀌지 않는다며 그저 즐겁게 살자고만 한다.
동아리 친구 중 흔히 '토종' 일본인은 몇 안 된다. '톰'의 부모는 일본인-미국 흑인이라 어디에서 살지 결정해야 하고, 홍일점인 '밍'도 중국인-일본인 부모 가정이다. 하지만 밍은 중국어는 거의 하지 못한다. 장난기 많고 밍과 잘 어울리는 '아타'와 유타만 해당한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동네 친구 사이인 그들 사이엔 출신이나 배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함께 음악을 즐기며 일상을 나누면 될 따름이다. 어른들의 왜곡된 잣대는 그들의 우정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청소년 시절에는 가능했던 격의 없는 우애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파도 앞에 침식되기 시작한다. 혐한 시위가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친구들도 조금씩 각자의 인생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코우 모자가 밤거리를 걷다 마주친 동네 규찰대 앞에서 어머니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다행히 아는 이웃들이라 웃으며 헤어지지만, 대를 이어 전승되었을 관동대학살의 역사를 새삼 떠올렸을 법하다. 그렇게 18살 친구들의 세상은 무너지는 중이다.
'학교'라는 세상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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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스틸 |
ⓒ 영화사 진진 |
SF 문법을 구사해 근미래 일본 사회와 과거사의 어둠을 끄집어내지만, <해피엔드>는 기본적으로 청춘 성장물의 얼개를 갖춘다. 18살, 이제 부모와 학교의 보호막이 걷히고 거친 세상의 파도에 정면으로 노출될 주인공들의 고민과 변화가 영화의 중심축으로 작동한다.
학교는 겉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친절하고 자유주의적인 교사도, 권위적이거나 처세에만 골몰하는 교사도 있다. 체벌은 사라졌지만, 학교는 학생을 통제할 다양한 수단을 보유한다. 물론 정부 역시 학교를 제어할 전가의 보도를 갖는다. 바로 교육재정이다. 대지진의 전조 속에 불안한 학교는 내진 대책을 위한 예산을 청구하지만, 제한된 재정을 핑계로 당국은 교묘한 줄서기를 조장한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과거나 현재나 권위주의적 정책이 취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정부 시책을 잘 받들면 이득을 얻고, 학교 자치를 포기하지 않으면 대가를 감수하라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들이 장난이라기엔 좀 규모가 크게 저지른 사건을 계기로 학교는 교내 실시간 감시체계를 도입한다. 학생 개인 안면 인식을 통해 사소한 건수까지 교내 전광판에 중계되고, 자동으로 인공지능에 의한 벌점 평가가 매겨지는 장치다. 의미심장하게 해당 시스템의 이름마저 제러미 벤담이 제창하고 미셸 푸코가 비판했던 근대 교도소 체제, '파놉티콘'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선 가상의 미래라지만, 이미 한국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활용하는 현실 기술 활용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학교 구성원 중에는 이른바 '순혈' 일본인이 아닌 비중이 작지 않다. 그들 다수가 이미 학교 밖에서 다양한 형태의 장벽을 느끼는 참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부류와 곧 졸업하니 그냥 참자는 부류가 나뉜다. 그러나 학교가 표방하는 '안전' 대책에 막연히 동의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다 같은 동급생이라 여겨왔지만, 친구들 사이의 '차이'는 은연중에 심화하던 참이다. 물론 그들이라 해서 다년간 함께 학교에 다닌 이들을 대놓고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소수 극단주의 세력의 선동이나 정부의 우경화 경향에 비판적으로 따져볼 생각도 딱히 없는 셈이다. 그렇게 어느새 기성세대에 물들어간다.
그런 섬뜩한 찰나는 틈만 나면 보안 감시자의 시선을 빌린 모니터 화면으로 드러난다. 안면 인식 기능을 통해 개개인에게 표식과 정보가 자동으로 올라오고, 이는 안보대책 특강에서 일본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조치들과 융합해 어떤 '징후'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난 세기에 순수혈통 대 혼혈을 나누고, 신민과 불령선인을 대비하던 역사다. 외부에 타자를 만들고 책임을 전가하는 케케묵었지만, 군중심리 흔드는 데 더없이 편리한 술수다.
청년세대를 향한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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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스틸 |
ⓒ 영화사 진진 |
절친 사이던 코우와 유타는 그들에겐 절대로 올 일 없으리라 믿었던 갈등에 봉착한다. 영혼의 단짝처럼 보이던 소꿉친구라도 기성세대가 멋대로 그은 분리장벽은 쉽사리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인 것이다. 차별을 온몸으로 깨닫기 시작한 코우 vs. 아직은 세상의 어둠과 대면하길 유예받은 유타의 시간은 점차 다른 궤적을 그려간다.
한 친구는 어차피 세상은 바꿀 수 없다며, 미끄러지듯 우리끼리 즐겁게 살자고 권한다. 하지만 한 친구는 불의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뭐든 해봐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평행선을 걷기 시작한 우정은 위태롭게만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안일하게 환경결정론에 기대려 하진 않는다. 청년세대가 가진 가능성과 구체제로부터의 단절 기회에서 미약하게라도 희망을 엿보려 한다. 과거에 68혁명과 전공투 세대가 도전한 것처럼, 우경화에 맞서는 평화운동의 활약처럼 다음 세대가 스스로 고민하며 가능성을 열어가리란 기대를 거두지 않는 태도가 확연하다.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을 학원물의 감성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상일 감독의 < 69 >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제법 있다. 두 작품의 차이라면 < 69 >가 68혁명 시절을 뭐든 도전할 수 있던 시절의 향수로, 학교를 자유분방한 축제의 해방구로 삼았던 순간의 추억을 회고담으로 다룬 데 반해, 현실과 근접한 미래 세대가 물려받은 구체제의 폐허를 극복할 가능성과 도전을 기약하는 대비다.
시종일관 여백을 채워주는 감각적 전자음악과 대비전문 연기자로 채워진 배우들의 근접도 강한 연기, 상징적으로 활용된 오르막길과 육교 등 은유가 삼박자 척척 맞춰 무척 흥미로운 SF+학원+청춘+사회파 드라마를 완성한다, 근래 부흥하는 일본영화 뉴웨이브의 또 다른 기대주로 네오 소라 감독의 이름을 각인하기에 충분한 수작이다.
<작품정보>
해피엔드
Happyend
2024|일본, 미국|드라마
2025.04.30. 개봉|113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네오 소라
출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펑 시나, 아라지, 이노리 키라라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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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포스터 |
ⓒ 영화사 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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