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방송·문화]
영화 촬영 겸한 사전 장례식 열려
지인 150명 참석해 추억 함께 나눠
박정자 “여러분이 계셔서 행복” 인사
배우 박정자가 25일 오후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순포해변에서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마지막 장면을 찍고 있다. 박정자가 작은 상여를 안고 있다.
25일 오후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순포해변. 소나무 길을 걷는 배우 박정자(83)의 뒤를 따라 150여 명이 걷는다. 꽃무늬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은 박정자가 활짝 웃고 있고, 박정자의 지인 150여 명은 손에 작은 만장을 들고 따른다. 이 만장에는 박정자가 그동안 출연했던 공연 제목이 쓰여 있다. 바닷가로 나온 이들 앞에 작고 하얀 종이 상여가 놓여 있다. 박정자는 종이 상여를 안고 바닷가 앞으로 나아가고, 지인들은 박정자를 둘러싸고 만장을 흔든다.
이날 바닷가에서 펼쳐진 것은 배우 박정자(83)가 주연을 맡은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마지막 장면인 장례 행렬의 촬영이었다. 박정자의 지인으로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을 비롯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송형종 서울문화재단 대표,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등 예술행정가부터 배우 양희경, 소리꾼 장사익, 무대디자이너 박병우, 국악인 원일 등 예술가들이 눈에 띄었다.
박정자의 지인들이 만장을 들고 박정자를 따라가는 모습.
배우로 잘 알려진 유준상(56)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는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여배우 ‘그녀’의 다양한 감정부터 죽음의 순간 그리고 장례까지 다룬 작품이다. 유 감독이 박정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토대로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다.
유 감독은 “3년 전 죽음을 생각하며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가 이번 영화의 OST로 사용한 ‘환한 웃음으로’다. 원래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려던 아이디어가 영화로 확장됐다”면서 “저예산 독립영화라 힘든 스케줄 속에서도 박정자 선생님은 힘든 내색 없이 촬영에 임하셨다. 오히려 선생님을 보면서 내가 감동해서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날 마지막 촬영을 마친 박정자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관객이 없으면 소용없다. 관객이 있기에 내가 에너지를 받는다”며 자신을 지지하는 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바닷가에서 ‘그녀’가 상여를 안고 걸어가는 장례 장면은 “삶은 죽음을 위한 리허설”이라고 생각해온 박정자의 아이디어다. 그리고 박정자는 장례 장면을 자신의 사전 장례식으로 정한 뒤 지인들을 초대했다. 지인들은 지난 4월 12일 박정자로부터 ‘부고(訃告): 박정자의 마지막 커튼콜’이란 제목의 긴 글을 받았다. 여기에는 장례식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박정자의 지인들은 영화 촬영을 겸한 사전 장례식 참석차 24일 오후 강릉에 모였다. 오죽헌에서 차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물은 이들은 인근 문화공간 ‘어흘리246 정원아버지’에 모여 장례식 전야제를 치렀다. “나의 친구여/ 나와 오래 동반해준 이여/ 꽃은 필요 없습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라고 적었던 박정자의 부고장처럼 이날 전야제는 지인들이 박정자에 대한 추억과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박용재 시인은 “박정자 선생님의 장례식이니만큼 묘비명을 생각해 봤다. ‘너, 내 연극 언제 보러 올래?’ 아닐까 싶다”고 말해 평소 비슷한 말을 자주 들었던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박정자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박정자는 전야제를 비롯해 장례식 촬영 당일 지인들과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에 웃음을 짓던 그는 마지막에 깊은 인사를 남겼다. “여러분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이 시간이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오늘 저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강릉= 글·사진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