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쓴 21개 요구조건2023년 7월 26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 인근에서 김성근 전 야구감독이 포즈를 취했다.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칠순이 넘은 시니어들도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너무 오래된 역사적 사실인 탓이다.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 회담을 서둘렀다. 당시 회담은 가다말다를 반복하며 정체 상태였다. 경제개발을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이 돈을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1961년 11월 12일 박 의장은 방미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조속한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으나 1년간 실무회담에도 진전이 없었다.
급기야 박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일본과 담판을 짓게 했다. 1962년 11월 12일 도쿄로 건너간 김 부장은 우여곡절 끝에 오히라와 일본 외무성 장관 메모용지에 서로가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던 액수와 조건을 써서 교환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요구조건 21개나 되는 김성근 메모
국가 간 협상에서 비밀 메모가 오가는 일은 더러 있으며 정치인들 사이에서, 또 개인 간에도 큰 계약이 오갈 때 비공식적인 메모가 가끔 등장한다. 프로야구에서는 어떤 메모가 있을까. 감독이나 유명 선수들이 다년 계약을 하며 성적에 따른 옵션을 정할 때 비공식 메모를 주고받는 경우가 2000년 초반까지 있었다.
프로야구 44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게 '김성근 메모'다. 이 메모가 기점이 돼 그를 '야구의 신(神)'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성근 메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필자만의 특종이었고, '김성근 메모'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졸저 '기억하라, 1982 프로야구 출범'(2013년 12월 간행)에서만 밝혀 자세한 내용을 일부 야구 관계자들과 독자들만 봤기 때문이다.
시곗바늘을 1986년 11월 말로 돌려보자. 당시 스포츠서울에서는 시즌 후 그해 성적을 토대로 '올해의 선수, 감독, 프런트' 등 프로야구 시상제도를 처음 만들었다. '올해의 감독'에는 3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따낸 해태 타이거즈(KIA 전신) 김응용 감독을 제치고 OB 베어스(두산 전신) 김성근 감독이 뽑혔다.
체육2부 기자였던 필자는 창원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김성근 감독을 인터뷰하러 갔는데, 기사를 마감한 후 저녁 늦게 출발했다. 창원의 OB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이 좀 넘었다. 필자는 홍보담당자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아 선수 숙소인 모 호텔에서 바로 숙박을 하려 했다.(당시는 출장가면 선수 숙소에 묵는 게 관례였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훈련을 하더라도 저녁 시간 이후에는 대부분 팀들이 감독·코치 따로, 선수 따로 술 한잔하는 분위기였던 탓이다.
하지만 숙소에 들어서면서 필자는 깜짝 놀랐다. 자정을 넘긴 시각인데도 선수들이 복도에서 스윙을 하고, 감독방에서는 비디오를 틀어 선수들 개별 타격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필자는 선수단의 부지런한 움직임에 감동을 받았고, '역시 우승팀 감독을 제치고 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태평양 구단, 기자에게 감독 추천 부탁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1988년 8월 8일 서울 동대문구장. 아마추어 야구도 담당했던 필자는 거기서 열린 봉황대기 고교야구를 취재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감독들은 경기를 하지 않는 월요일에는 동대문구장에 나가 유망주를 물색하곤 했다.
필자는 1루 더그아웃의 승리팀 감독과 인터뷰를 한 뒤 기자실로 돌아가려는데 난데없이 OB 김성근 감독이 "김형, 나 좀 봅시다~"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론은 "올해가 계약 마지막인데, 다른 팀 감독 자리 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 감독은 모종의 사건으로 OB와의 재계약이 힘들게 돼, 만나는 기자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탁을 했다.(이 사건으로 다른 구단 이적도 힘든 상태였다.)
급기야는 별 친분이 없던 나에게까지 아쉬운 소리를 했던 것. 사실 야구기자가 감독의 다른 행선지를 주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으로서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다급한 심정'으로 기자들에게 부탁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김 감독이 운이 좋아서였을까. 당시 태평양 돌핀스(1996년 3월 현대 유니콘스에 매각)는 창단 첫해인 1988년 시즌을 최하위로 마쳤다. 담당기자인 필자를 엄청 신뢰했던 신동관 구단사장은 나를 만나 "분위기 쇄신을 위해 새 감독을 찾고 있다. 좋은 감독을 추천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게 아닌가.
한쪽에서는 새 구단을 찾아 달라 하고 한쪽에서는 새 감독을 요구하니, 이런 찰떡궁합이 어디 있나. 그래서 필자는 양자를 소개시켜주고 '특종기사'를 쓸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신 사장이 급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구단 사무실로 가니 신 사장이 메모를 보여주며 "김형, 이걸 다 들어줘야 돼?" 하지 않는가.
메모를 자세히 보니 깨알 같은 일본어로 '21개의 요구조건'이 쓰여 있었다.(재일동포 출신인 김 감독은 코칭스태프 미팅 때도 가끔 일본말을 했고 메모는 반드시 일본어로 했다.) 일본어라 내용은 잘 몰랐지만 '실내 연습장 신설' 등 선수단 전력강화에 필요한 사항인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태평양그룹은 아마추어 여자농구팀(대표선수 박찬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선수들 월급은 정해져 있는 거고, 있는 체육관 시설에 유니폼과 공만 주면 되니, 별 돈을 들이지 않아도 팀은 늘 우승권을 달렸다.
선수 혹사 vs 야구 열정, 뚜렷한 명암
아무리 프로팀이지만 21개나 되는 요구조건은 지나친 요구라고 판단해 신 사장이 필자에게 자문을 구한 것. 메모를 받아든 필자가 신 사장의 구미에 맞게 "맞습니다. 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네요" 했다면 김성근 감독은 태평양 감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게 다 약팀을 강팀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들더라도 꼭 들어주세요"라고 해서 '제2대 태평양 돌핀스 김성근 감독'이 탄생한 것이다.
'21개의 요구조건'으로 훈련 여건이 좋아진 데다 김 감독 특유의 지옥훈련 덕분에 태평양은 1989년 시즌 3위를 차지하며 프로야구판에 돌풍을 일으켰다.(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져 한국시리즈 진출은 무산) 김 감독은 태평양에서의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이후 '삼성-쌍방울-LG-SK-한화' 등 7개 팀 사령탑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전신) 시절인 2007~2008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둬 '야신 김성근'으로 우뚝 섰다. 물론 그에 관한 독특한 공과(功過)로 인해 '과연 야신이냐, 아니냐'는 논란을 팬들 사이에 늘 불러일으킨다.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선수 혹사(하루 연습 투구 2000번, 빈 스윙 7000번을 한 선수도 있다), 가는 팀마다 일으키는 구단과의 갈등은 김성근 감독의 '흑(黑)역사'다. 야구로 인해 부(富)를 많이 쌓았음에도 사회는 물론, 야구계에 별다른 기부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그러나 혹독하지만 선수 마음을 움직이는 특유의 리더십, 무명 선수를 스타급으로 키운 무시무시한 훈련과 육성, 야구에의 끝없는 열정은 신세대 감독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다.
이 기사를 쓰면서 참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10년 전이라 메모를 자료로 확보하지 못한 점, 필자는 당시 일본어 중급 정도의 어휘력이 있었음에도 재빨리 '21개 요구조건'을 취재수첩에 옮기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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