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증거 첫 제시
19세기 미국 예술가 윌리엄 림머가 검투사와 사자의 싸움을 묘사한 그림 '아레나 속 사자'. Reynolda House Museum of American Art/위키미디어 제공
문서와 그림 기록에 따르면 과거 로마 제국에서는 검투사들이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에서 다른 검투사뿐 아니라 사자와 호랑이, 곰 등 맹수와도 싸운 것으로 전해지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로마 검투사로 추정되는 유골에서 맹수의 이빨 자국을 확인해 처음으로 검투사와 맹수 사이에 벌어진 전투의 물리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팀 톰슨 아일랜드 메이누스대 인류학과 교수팀은 로마 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골에 남은 육식동물의 이빨 자국을 정밀 분석하고 연구결과를 23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에 공개했다.
지금의 영국 요크 지역은 3~4세기경 로마 도시 '에보라쿰'이었다. 로마 제국은 원주민인 켈트인들을 몰아내고 1~5세기에 영국땅을 점령한 상태였다. 2010년 요크의 로마 시대 유적지인 드리필드 테라스에서는 82구의 유골이 발굴됐다. 대부분 외상 흔적이 있는 젊은 남성의 유골이다.
당시 유골의 치아 법랑질 분석 결과에 따르면 매장된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다양한 지방에서 모인 것으로 확인됐다. 특별한 장례 의식이 이뤄졌다는 점과 훈련, 폭력으로 인한 흔적의 빈도가 높다는 사실을 통해 매장된 사람들이 일반 병사나 노예가 아닌 검투사라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영국 요크의 로마 시대 유적지인 드리필드 테라스에서 발견된 젊은 남성 유골의 골반뼈. 사자로 추정되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다. Maynooth University 제공
한 유골의 골반뼈에서는 커다란 함몰 흔적이 발견돼 검투사가 큰 육식동물과 싸우다 이빨에 물린 자국으로 추정됐다. 연구팀은 골반뼈의 함몰 부위를 3차원으로 스캔해 다양한 동물들의 이빨 자국과 비교했다.
이빨 자국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 그중에서도 사자가 물어뜯은 자국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원 사자의 이빨 자국과 비교한 결과다. 보통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는 사자의 이빨 자국이 골반에 위치한 이유로 검투사의 사망 전후로 사자가 몸을 뜯어먹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유골의 주인은 26~35세 사이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다른 사람 2명과 함께 묻혔고 말 뼈로 덮여 있었다. 생전 등 부위에 과도한 부담이 가해졌고 폐와 허벅지에 염증이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사망 후 머리가 잘렸지만 이유는 불분명하다.
유골 주인은 자발적으로 맹수와 싸우는 검투사인 '베스티아리우스(Bestiarius)'로 추정됐다. 죄를 지어 맹수에게 '처형'당한 노예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흔히 검투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보통 인간과 싸우는 검투사를 말한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내부 전경. 과거 로마 제국 시절 검투사들이 다른 검투사나 맹수와 전투하는 경기장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연구팀은 "로마 제국 시대 유럽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의 전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첫 물리적 증거"라며 "이런 '스포츠 행사'가 로마 본토를 넘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요크 지역에서는 4세기까지 검투사 '공연'이 열렸을 것으로 분석된다.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 연구기관인 영국 요크 아키올로지의 최고경영자(CEO) 데이비드 젠킨스는 "고고학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발굴 이후 시간이 지나도 연구방법과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발견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 doi.org/10.1371/journal.pone.0319847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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