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개화·낙화에 숨은 원리는
온갖 물질의 집단지성
'플로리겐' 'FT 단백질'
꽃 피우는 유전자 자극
'피오나 1번' 유전자는
생체시계 조정자 역할
밤낮 길이부터 기온까지
확인에 확인 거쳐 결정
꽃잎 떨어질 시기엔
세포 벽 보호하기 위해
'리그닌' 물질 생성해
스스로 울타리 만들어
농업 생산량 높일 열쇠
개화·낙화시기 조절해
채소 수확 편하게 하고
과일 낙과는 줄일 수도
꽃은 어떻게 봄을 알까. 언제 활짝 피었다가 언젠쯤 지면 되는지를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는 걸까. 서울에 벚꽃이 핀 건 지난 4일이다. 보통 벚꽃이 피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만개하기 때문에 이번 주말(12~13일)이 서울에서 벚꽃 구경하기 가장 좋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개한 벚꽃은 거의 바로 지고 만다. 벚꽃은 개화 후 2주 정도 지속되며, 만개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벚꽃은 어떻게 봄의 전령이 됐을까. 추운 겨우내 웅크려 있다가 어떻게 봄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꽃이 피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 수많은 벚꽃잎이 동시에 떨어지는 걸까. 생물학자들은 식물이 계절을 알아차리는 방식을 오랜 시간 연구했다.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식물은 온도와 광주기(낮과 밤의 길이) 등 다양한 조건을 감지해 꽃을 피워낸다. 여기에는 호르몬과 유전자, 여러 가지 물질이 관여한다.꽃을 피우는 데 가장 중요한 물질은 '플로리겐'이라는 호르몬이다. 1937년 식물생리학자 미하일 차일라햔은 꽃이 핀 식물의 일부를 꽃이 필 수 없는 식물에 접붙였더니 꽃이 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꽃이 핀 식물 안에 있는 어떤 물질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차일라햔은 그 물질에 '플로리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 수십 년간 플로리겐이 정확히 어떤 물질인지 알 수 없었다.
개화의 비밀이 밝혀진 건 1990년대 유전공학 덕분이었다. 당시 학자들은 애기장대를 분석해 꽃이 피는 애기장대와 피지 않는 애기장대의 유전자를 비교했다.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루미니디펜던스'라는 개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후에도 많은 연구자가 연구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큰 기여를 했다.
1995년 독일의 데트레프 바이겔 교수와 일본의 아라키 다카시 교수가 'FT(Flowering Locus T)'라는 단백질을 최초로 발견했다. 당시 과학계는 발견 직후에 FT가 플로리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후속 연구가 이뤄지면서 FT가 플로리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2003년 일본 고토 고지 박사는 FT의 유전자가 식물의 관다발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밝히고, 2007년 독일의 조지 코플랜드 교수가 애기장대와 벼에서 FT 단백질이 만들어진 후 식물의 생장점인 정단조직으로 이동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정단분열조직은 줄기나 싹의 끝부분에 있는 줄기세포 조직으로, 꽃이 피는 장소이기도 하다. 잎에서 만들어진 FT는 정단조직으로 이동해 개화 유전자의 발현을 유도하고, 마침내 꽃을 피워낸다. FT가 바로 수십 년간 과학자들이 찾았던 플로리겐이었다. FT를 조절하는 건 밤낮의 길이 변화다. FT는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더 길어지는 조건에서 CO라는 단백질에 의해 유도된다.
송영훈 경상대 박사는 2013년 식물에 있는 광수용체가 CO라는 단백질을 조절하고, 최종적으로 FT의 발현까지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에 따르면 광수용체는 늦은 오후에 CO와 결합해 안정화시키고, FT 유전자를 저해하는 물질을 분해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FT의 발현을 조절했다.
2008년 남홍길 당시 포항공대 교수는 식물의 생체시계 주기에 관여해 개화를 결정하는 '피오나 1번' 유전자를 발견했다. 생물은 각자의 생체리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낮과 밤을 짐작하고, 대략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있는 이유다. 식물의 생체시계는 호르몬 분비, 광합성, 성장 등의 리듬을 조절하고 연중 개화 시기까지 결정한다. 남홍길 교수 연구에 따르면 피오나 1번 유전자는 식물 생체시계의 진동 주기를 조절한다. 생체시계는 수학의 사인함수 그래프처럼 주기, 진폭 등을 갖는다. 이 중 피오나 유전자는 진동 주기를 조절해 생체리듬의 길이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 연구팀은 애기장대에서 이 유전자의 기능을 정지시키자 식물의 생체리듬이 24시간에서 27시간으로 늘어나는 것을 관측했다. 식물이 24시간 단위로 광합성을 하고, 이런 리듬이 쌓여 꽃을 피울 시기도 결정하는데, 만약 이 리듬이 늘어나면 개화 시기도 미뤄진다.
안지훈 고려대 교수는 2013년 대기의 온도를 감지해 개화 시기를 조절하게 하는 식물의 유전자를 발견해 'FLM(Flowering Locus 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곽준명 DGIST 뉴바이올로지학과 교수(IBS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는 식물의 개화 시기가 하나의 단백질이 단독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여러 단백질과 유전자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개화를 결정한다는 연구 결과를 2016년 발표했다. 식물의 염색체는 DNA가 히스톤 단백질 8개를 감싸고 있는 형태다. DNA가 히스톤 단백질을 얼마나 단단하게 감싸고 있는지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 여부가 결정된다. 특정 효소에 의해 아세틸화가 일어나면 히스톤과 DNA의 연결이 느슨해져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반면 탈아세틸화가 이뤄지면 결합이 단단해져 DNA 전사가 불가능해지고 유전자는 발현되지 못한다. 이 과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가 식물 생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외에도 여러 조건과 단백질, 유전자가 함께 관여해 식물의 개화를 결정한다. 하지만 어렵게 피운 꽃도 금방 진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열흘 이상 피어 있는 꽃은 없다. 벚꽃이나 개나리 같은 꽃들은 2주를 채우지 못하고, 지속 기간이 짧은 목련의 꽃은 일주일 남짓이다.
따뜻해진 봄의 기온, 밤보다 길어진 낮을 감지해 꽃이 피었는데, 어떻게 알고 지는 것일까. 따뜻한 기온과 낮밤의 길이는 똑같은데도 말이다. 꽃이 지는 원리가 밝혀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꽃이 피는 원리를 밝혀낸 곽준명 DGIST 교수가 꽃이 지는 원리도 밝혀냈다. 2018년 곽 교수는 식물의 노화 과정에서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꽃잎이 떨어져야 할 정확한 위치에서 잎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셀'에 게재했다. 연구진은 꽃잎이 떨어진 이후 식물에 남아 있는 세포와 떨어진 세포를 비교·분석했는데, 떨어진 세포에서만 리그닌이 형성된 것을 확인했다. 페놀 중합체 성분으로 이뤄진 리그닌은 원래 세포벽을 단단하게 만들어줘 식물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세포막으로만 감싸인 동물세포와 달리 식물세포는 세포벽이라는 단단한 벽으로 감싸여 있다. 꽃잎이 떨어지려면 단단한 세포벽을 분해해야 한다. 세포는 내부적으로 세포벽 분해효소를 만들어낸다.
세포벽이 단단하게 감싼 형태로는 세포가 분열하고 식물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효소가 세포벽을 분해하고 리그닌이 다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반복된다. 꽃잎이 떨어질 시기에 세포벽 분해효소가 정확한 위치를 분해시킬 수 있도록 리그닌이 울타리 역할을 한다. 만약 리그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세포벽 분해효소가 식물의 다른 부분으로 퍼진다. 꽃잎이 떨어지고 난 후 잔존세포는 외부 감염으로부터 취약하기 때문에 새로운 보호층을 만들어야 하는데, 만약 세포벽 분해효소가 퍼지게 되면 보호층을 형성하지 못한다. 리그닌이 떨어지는 세포의 표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다. 가을에 낙엽과 과일이 떨어지는 원리도 이와 동일하다. 다만 꽃잎이 떨어질 시기를 어떻게 알아차리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곽 교수는 "중요한 문제지만 식물이 어떻게 판별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며 "식물의 유전 정보에 '코딩'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개화 시기가 꽃이 지는 시기와 연결돼 있을 거라고 추정하는 단계다. 곽 교수는 "꽃은 식물의 번식기관이니까 다음 세대로 가려면 열매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마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과정에서 어떤 신호가 리그닌을 형성하고 꽃잎을 떨어뜨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화와 낙화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는 추후 산업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농업에서 식물의 개화 시기를 조절하면 식량 생산량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개화 유전자를 조절해 개화를 앞당길 수 있으면 식량 생산 시기 역시 빨라진다. 낙화(탈리) 연구도 마찬가지로 수확량을 늘리는 데 활용된다. 고추 같은 경우는 열매가 잘 안 떨어져 수확이 어려운데, 탈리를 촉진하면 수확량을 늘릴 수 있다. 반대로 과일은 탈리 현상을 억제해 낙과를 줄여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최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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