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메이저 미술관, 한국 작품 전시
전례 없는 진위 공방 불거질 듯
화랑협회·박수근 아들도 문제제기
라크마뮤지엄 전시에 박수근의 작품으로 명기된 유화 ‘와이키키’. 현지 교민 사진영상에서 따온 이미지다.
아시아 미술 컬렉션으로 이름 높은 미국 서부의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라크마)과 한국의 화랑협회, 감정전문가들 사이에 이 미술관의 한국 전시작품들을 놓고 진위작 공방이 불거질 조짐이다.
지난 2월25일부터 라크마에서 시작된, 80대 재미동포 수집가의 한국 고미술 및 근대미술 컬렉션 기증전 ‘한국의 보물들’이 단초가 됐다. ‘국민작가’로 일컬어지는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의 작품이라고 명기된 낯선 그림 넉점이 출품작들에 포함돼 내걸렸는데, 개막 직후부터 현지 컬렉터들 사이에 도상의 배치나 표현 기법 등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를 파악한 한국 화랑협회 감정운영위원회(위원장 황달성 협회장)와 협회 감정위원인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박수근의 아들로 유족 대표인 박수근감정연구소(소장 박진흥)가 뒤이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협회의 감정운영위원회와 박씨가 국내 전문가 가운데 유일하게 작품들을 본 윤 전 관장의 견해를 중심으로 라크마 쪽에 전시 경위와 진품으로 감정한 근거를 요청하는 3자 명의의 공식질의서를 전달하기로 최근 방침을 확정한 것이다.
문제의 작품들은 박수근의 것으로 표기된 두점과 이중섭의 것으로 표기된 두 점이다. 박수근의 작품으로 명기된 두 점은 ‘와이키키’,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란 제목을 단 유화다. 별 모양 점들이 찍힌 푸른 밤하늘 아래 현지 해변 풍경이나 아이 안고 광주리를 인 여인들 상이 등장한다. 이중섭 것으로 표기된 작품 두 점은 오색빛 하늘과 산야를 배경으로 벌거벗은 소년이 소의 등을 탄 모습의 유화인 ‘황소를 타는 소년’(이중섭)과 ‘기어오르는 아이들’이란 타일 그림이다. 윤 전 관장은 “관장 재직시절인 지난 2022년 국립미술관이 라크마와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전을 공동 개최했을 때 문제의 작품 실물들을 라크마 수장고에서 모두 봤다. 의심할 나위 없는 위작으로 판단돼 의견서를 써줬다”고 증언했다.
박수근의 작품으로 명기된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 현지 교민 사진영상에서 따온 이미지다.
화랑협회 쪽은 이와 관련해 최근 감정운영위원회를 여러차례 소집해 논의한 뒤 질의서 발송 방침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협회 쪽 관계자는 “라크마에 전시된 이중섭, 박수근 작품들에 대한 현지의 문제제기와 현지 전시 보도 내용 등을 검토한 결과 전시된 네 작품이 국내 미술시장의 이중섭 박수근의 진위작 감정 기준에 혼란을 줄 우려가 있어 일단 라크마 쪽에 정중한 질의서를 보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윤 전 관장도 “내가 본 작품 이미지들을 확대해 감정위원들과 검토한 결과 실물을 본 것은 아니지만 두 작가의 전형적인 인물 도상들을 맥락 없이 낮은 수준의 필력으로 짜깁기한 것들이어서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는데 이견이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질의서 안에는 유족들이 생존해있는 박수근 작품들을 중심으로 4~6개 정도의 항목을 구성해 전시 경위와 진품 판단 경위에 대해 묻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중섭의 작품은 박수근보다 소략하지만, 역시 비슷한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의 다른 관계자는 질의서 문구 초안은 윤 전 관장이 작성해 협회와 유족 쪽의 의견을 담아 수정한 뒤 영역 작업을 진행했고, 내주 초까지 마이클 고반 라크마 관장 앞으로 발송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보물들’ 전은 원로 재미동포 수집가가 지난 2021년 미술관 쪽에 기증한 한국 고미술과 근대미술 컬렉션 100여점 가운데 고서화와 근대미술품, 수석 등 35점을 추려 선보이는 전시회다.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들 외에 한국 근대회화의 선구적 작가인 김관호(1890~1959)가 50년대 북한에서 그렸다는 초상화와 풍경화, 월북 화가 이쾌대(1913~1965)의 월북 이후 풍경화, 조선 후기 불화와 청화백자 등이 나왔다.
중국미술사 전문가인 스티븐 리틀 라크마 아시아미술관장이 작품들의 재료와 시기를 검증하면서 준비했으며 도록도 곧 발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라크마 쪽은 전시 공간에서 기증자를 “미술관의 전 이사회 구성원이며 19세기 말 조선 고종임금의 왕비 ‘명성황후'의 후손”이라는 문구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2021년 기증 당시 박수근·이중섭 그림을 포함한 한국 근대미술품들의 출처에 대해 1960~1970년대 초 한국에서 주한미군 등을 통해 구입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서구의 메이저 미술관이 공개 전시한 한국 미술품 진위를 놓고 국내 기관과 전문가들이 공문을 보내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상당한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라크마 쪽 대응에 따라 태평양을 오가는 진위공방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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