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시험 항해 동행 취재
2011년 가동 이후 극지 연구 실적 크게 늘어
극지연구 국제화 이끌어美·英이 먼저 찾아와
“북극이사회 발언권, 아라온호 없었으면 불가능”

시험 운항을 앞두고 포항 신항에 정박해 있는 국내 유일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모습./포항=홍아름 기자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 16일. 포항 신항 안으로 이어진 긴 도로를 따라 들어가자 출항 준비가 한창인 붉은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 유일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였다. 쇄빙선은 빙판 위에 올라가 선체의 무게로 빙판을 깨뜨리며 이동하는 선박을 말한다.

지난 6월 극지연구소(극지연)의 아라온호에 닷새간 탑승해 동해 일대에서 진행된 시험 항해에 동행했다. 아라온호는 매년 여름에는 북극, 겨울에는 남극을 오가며 극지 연구를 수행한다. 이번 항해는 7월 초 북극 출항을 앞두고 장비를 점검하는 일정이었다.

아라온호는 총톤수가 7507t에 길이는 111m에 달한다. 선박에는 67명의 연구진과 선원, 기술 인력 등이 승선했고, 해양과학과 환경, 기후, 자원 탐사 분야의 연구를 위한 10여 종의 연구 장비가 동시다발적으로 시험 가동됐다. 선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과학기지에 가까웠다.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출항을 앞두고 최한샘(왼쪽) 일등항해사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포항=홍아름 기자

배에 탑승한 첫날, 소음과 진동이 먼저 몸을 흔들었다. 7500t의 거대한 선박을 움직이는 엔진음과 기계음은 선실 전체를 울렸고, 심할 때는 복도에서 대화조차 쉽지 않았다. 첫날은 하루 종일 머리가 멍했다. 김형렬 극지연 연구원은 “아라온호는 얼음을 깨기 위해 선체가 뾰족한 편이라, 일반 선박보다 흔들림이 훨씬 심한 편”이라며 “그래도 이번 시험 항해 때는 날씨가 좋아 그나마 흔들림이 덜한 편”이라고 말했다.

실험실이 있는 메인 데크로 내려가자 선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엔진 소음 속에 실험 장비가 작동하고 연구자들의 대화 소리가 새로 들렸다. 연구진들은 새벽까지 실험 시간을 쪼개가며 장비를 시험했고, 파도와 바람, 날씨에 따라 실험 순서를 조정했다.

아라온호에서 연구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은 식사 때였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복도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식당에는 잠시 활기가 돌았다. ‘아라온호 식사는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한 연구원은 “고된 실험 일정 중 소소한 위안이 된다”며 웃었다.

짧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배 안에서 누군가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라온호에서 하루는 낮과 밤이 아닌 실험 단위로 흘러갔다. 시험 항해를 총괄한 신동섭 극지연 수석연구원은 “이번 항해는 북극, 남극에 가기 전에 모든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중요한 기회”라며 “일정 내내 밤낮 없이 장비 상태를 체크하느라 잠을 못 자기 일쑤”라고 했다.

아라온호에서 테스트를 위해 다중 채널 탄성파 탐사기를 크레인으로 내리고 있다./홍아름 기자

이번 항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비는 해양 지질 탐사를 위한 ‘다중 채널 탄성파 탐사기’ 였다. 압축 공기를 순간적으로 바닷속에 발사한 뒤, 그 충격파가 해저 지층을 통과해 되돌아오는 음파를 측정하는 장비다. 일종의 해저 CT(컴퓨터단층촬영) 스캔인 셈이다. 북극해에서는 지반 깊은 곳까지 음파를 쏘아 올려 수면 아래 감춰진 지층의 형태와 구조를 수십㎞ 깊이까지 읽어낸다.

본격적인 가동에 앞서 장비 시험을 준비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날씨가 맑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양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면서, 바람의 세기, 파고의 높이, 조류 방향까지 계산해야 했다. 갑판에서는 연구원들이 무거운 케이블을 조심스럽게 끌어 내려 장비와 연결하고, 센서 하나하나의 위치와 발사 각도를 정밀하게 조율했다.

탄성파 탐지기 장비로 확보한 데이터는 북극 대륙붕 지질 구조, 해저 동토층 분포, 탄소 순환 모델 등 다수의 논문과 특허로 이어졌다. 강승구 극지연구소 연구원은 “이 장비 덕분에 북극 대륙붕의 해저 동토층과 에너지원인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분포를 알아냈다”며 “원래는 보고조차 안 된 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해저 동토층은 기후변화의 시한폭탄으로도 불린다. 수온이 상승해 동토층이 녹으면 온실가스인 메탄을 방출해 온난화를 가속한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최대 80배 강력한 온실가스로 알려져 있다.

강 연구원은 “특히 캐나다 측은 1970년대 탐사 이후로는 대륙붕 연구를 멈춘 상태였는데, 캐나다 지질조사소와 공동연구를 진행해 정밀한 공간, 수치 데이터를 확보했다”며 “현재도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락 코어러를 이용해 얻은 해저 지반의 암석./신동섭 수석연구원

아라온호 갑판에서는 암반 시추 장비인 ‘락 코어러(Rock Corer)’에 대한 시험도 진행 중이었다. 락 코어러는 바닷속 암반을 뚫고 석유를 시추하듯 암석을 원형 그대로 채집하는 장비로, 국내 기술로 개발된 첫 해양 암석 채집 장비다.

락 코어러 개발을 담당한 박재범 신양기술 대표는 “이전엔 포크레인 주걱처럼 생긴 장비로 자갈만 건졌지만, 이제는 암반의 원형을 통째로 채집해 지층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며 “향후 남극 해역에서 해저 지각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활용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라온호에서 수행되는 실험들은 극지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고 있다. 아라온호는 2011년부터 극지 연구에 투입됐다. 이를 기점으로 극지연구소의 특허 출원 수와 논문 게재 수가 확연히 달라졌다.

2010년만 해도 극지연이 낸 특허가 16건, 논문은 45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29건의 특허를 내고, 181건의 논문을 게재했다. 상위 20% 저널에 게재한 논문만 놓고 보면 10배 이상 늘었다. 극지연 관계자는 “아라온호 이전에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기술료 수입도 최근에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라온호는 한국 극지과학의 국제화도 이끌고 있다. 캐나다, 미국,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 연구진이 아라온호에 직접 승선해 공동 실험을 수행한다. 과거에는 우리가 해외 연구선에 동승하거나 파트너를 찾아가야 했던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아라온호가 그들을 한국으로, 아라온호로 불러올 수 있다.

그래픽=정서희

해가 갈수록 북극 연구의 성과도 늘고 있다. 2011년에는 아라온호를 이용한 북극해 연구 수행 기간 20일에 참여 과제도 1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연구수행기간 34.7일로 늘고 참여 과제는 13개로 증가했다. 한국이 북극 국제 공동 연구의 중요한 파트너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성과는 2013년 한국이 북극이사회 정식 옵서버 지위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북극이사회 정식 옵서버가 되면서 한국은 북극이사회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게 됐다. 앞으로 북극연구 진흥과 북극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시험 항해에서 만난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이 배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탐사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장비를 실험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하나의 선박 안에서 수행하려면 상당한 규모의 인력과 장비, 환경이 동시에 뒷받침돼야 한다. 아라온호는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공동 기획 : 조선비즈·극지연구소)

최한샘 1등 항해사가 아라온호에서 촬영한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의 모습./최한샘 1등 항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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