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군함도 후속 이행조치가 적절한지 잠정 의제안에 대해 표결을 일본이 요청하면, 그것 자체가 유네스코 기본 원칙(만장일치)에 대한 위배입니다.”

일본 미쓰비시 석탄광업의 주력 탄광이었던 군함도. 나가사키=홍인기 기자

정부 당국자는 제4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잠정 의제로 제안된 일본의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이행조치 검토의 건에 대한 일본의 반대 의사 표명이 유네스코 관행 및 질서를 스스로 흔드는 일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회의 당일 정반대 상황이 펼쳐집니다. 유네스코의 기본 원칙을 깨고 표결을 요청한 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었습니다. 심지어 표결 대상은 한국이 제안한 안건이 아니라 '한국이 제안한 잠정 의제를 제외한 모든 안건을 다뤄달라'는 내용의 일본 측 수정안이었습니다. 정부 설명이 틀렸던 겁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정부, 처음엔 '승산 있는 싸움'이라 봤다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후 전개 일지. 시각물=김대훈 기자

당초 군함도는 사전에 잠정 의제로만 포함됐습니다. 한국이 세계유산위 위원국이 아니었던 2022년과 2023년 당시 일본이 교묘하게 군함도 이행조치를 차기 회의 심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손을 써놨기 때문이었죠. 몇 달간 외교전을 펼친 한국은 어렵게 군함도에 대한 이행조치가 세계유산위의 보편적 핵심가치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를 정식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식 의제로 채택되려면 21개 위원국 동의가 필요합니다. 일본이 동의할 리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도 사전 비공개 협의를 거쳐 공식 회의장에서는 모두가 찬성하는 형태의 타협적 의사진행을 선호하는 유네스코 관행을 감안한다면, 안건을 상정해 두기만 하면 한국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례적으로 타협 분위기를 깨고 안건에 대한 표결을 요청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래서 정부에서도 군함도 문제가 회의에서 다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고, 일본이 표결을 요구하더라도 '확실한 승산이 있다는 전제하에 수용하자'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일본 역수정안 제안에 허 찔린 정부

그러나 회의 개시 직후 모든 상황이 한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일본은 유네스코 절차법을 교묘히 이용해 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가져갔습니다. 한국의 제안에 반대하는 역(逆)수정안을 회의 도중 낸 건데, 유네스코가 절차상 가장 최근 제출된 수정안을 '가급적 표결이 아닌 위원국 전원동의' 형태로 채택하는 점을 활용한 거죠. 그러는 바람에 표결을 요청해야 하는 쪽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된 것입니다.

일본이 표결을 요청한다면 자국에 유리하게 의제를 설정하기 위해 '모범국' 이미지를 버리고 유네스코 원칙을 위배했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고 했던 정부 설명은 되레 우리나라에 적용되는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실제 전례 없는 표결을 한국이 요청했을 때 제3 위원국인 그리스가 "이런 전례는 없었다.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당사국 간 비공개 협의를 진행해 세계유산위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배경입니다. 오히려 한국이 무리수를 둔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입니다.

"군함도 이행조치 해석, 유네스코 차원 문제 아니다"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km 떨어진 하시마(군함도) 전경. 위키피디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계유산위 사무국과 자문기구는 이번 회의에서 뜻밖의 발언을 합니다.

“이 사안은 유네스코 핵심 보존가치에 대한 실질적 위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 이미 판단을 한 바 있고, 지난 3월 일본 업데이트 보고서에 대한 검토보고서에 ‘한국과 일본은 위원회 바깥에서 양자 차원에서 대화를 지속해 나갈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역사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역사란 항상 해석의 문제이며, 많은 유산이 논쟁적이지만 모두가 보편적 가치에 직접 연관돼 해석되는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역사를 일본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유네스코 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세계유산위 사무국과 이코모스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군함도 이행조치는 유네스코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핵심 정신을 훼손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유네스코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한국 논리를 반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세계유산위에서 자문기구인 이코모스 권위는 매우 높습니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이코모스의 권고는 세계유산위가 결정을 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다만 최근 이코모스의 권고를 따르지 않은 위원국들의 사례가 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코모스 권고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들은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정치화하려는 국가'라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한국이 이코모스의 권고에 따르지 않는다면, 유네스코 내 우리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정권교체 및 인사이동 맞물린 TF… 준비 짧았다

2022년 7월 4일 촬영된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군함도(일본명 하시마). 앞쪽 왼쪽에서 두 번째 건물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의 숙소로 사용된 66호 건물이다. 하시마=연합뉴스

세계유산위 회의 시작 후 지난 13일까지 총 54건의 수정안이 제출된 점을 고려하면, 일본 측 수정안에 한국이 재수정안을 제시하며 의제를 복구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나리오는 왜 논의되지 않은 것일까요.

정부 소식통은 "대통령실은 한국이 제안한 안건을 두고 표결 요청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며 "수정안은 단순 기술적 사안으로 핵심이 아니라는 취지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수정안은 회의 기류를 뒤집어 버린 핵심 사안이었습니다. 이미 3월 당사국들에 공지됐다는 이코모스 검토보고서는 유네스코 차원에서 군함도 문제를 지속적으로 얘기해 나갈 근거를 흔들었습니다. 우군 확보를 위한 사전 작업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규정에 대한 이해까지 한국이 일본에 밀린 것입니다.

회의 준비기간을 고려하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이후 관련 문제를 다투는 외교부 유네스코협력 태스크포스(TF)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모두 인사 이동이 이뤄졌습니다. 현재 유네스코TF는 부임한 지 약 6개월 정도밖에 안 된 이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일외교 전문가들도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고 해도 '조약국'을 핵심 승진 코스로 여기며 유네스코 절차 이해도가 높은 일본을 상대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더욱이 정권 교체기에 회의가 열리면서 다른 외교 현안이 산적한 대통령실도 꼼꼼히 들여다 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계속될 한일 역사 외교전... 한국의 선택은

문제는 이런 사정을 국제사회가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피해자임을 앞세워 윽박지른다고 해서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습니다. 도의적 명분을 주장해도 절차와 문화, 특히 국제 여론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번 세계유산위 표결 결과가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강제동원 현장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일본이 '근대산업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추가로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할 후보군에는 구로베댐이나 아시오 탄광처럼, 조선인 피해를 입증하기 위한 근거 자료가 부족한 현장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이 이 장소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할 때, 한국의 대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표결에서 지더라도 '한국은 반대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목표가 돼야 할까요. 아니면 사도광산 때처럼 일부 이행조치를 얻어내고 해당 조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치열한 외교전을 모색하는 것이 목표여야 할까요.

우리가 일부 이행조치를 약속받고 끊임없는 외교전을 벌이는 사례로 군함도, 사도광산이 있습니다. 협상을 한 덕분에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당시 일본 스스로 국제무대에서 조선인들이 '의사에 반해 노동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광산 때는 '강제동원' 발언을 받아내진 못했지만, '전시관에 전시해야 할 내용' '추도식에서 기려야 할 대상'을 유네스코 공식 기록에 남겨두어 일본이 이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군함도는 실질적 이행조치를, 사도광산은 추도식 형식을 두고 여전히 한일 간 갈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면 표결에서 지더라도 원칙적 입장 표명에 집중한 사례로는 이번 군함도 잠정의제 채택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표결에서 한국은 큰 표 차로 패했지만, 과거사 현장을 다루는 데 있어 한국의 원칙과 입장을 국제사회에서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적 행태도 공론화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유네스코 차원에서의 싸움은 한국에 유리하지 않습니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외교전은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정책 결정권자들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패배가 전화위복으로 한국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새 정부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시절인 지난해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한일 협상을 담은 보도자료를 허위 작성(일본 유네스코 수석대표의 발언의 뉘앙스를 반영)했다는 이유로 외교부 장관과 담당공무원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습니다. 당시 조치로 유네스코TF의 인사이동이 앞당겨졌고, '열심히 일해봤자 말단 사무관까지 고발당한다'는 인식이 퍼져 해당 TF는 기피 부서가 됐습니다. 이젠 집권여당이 된 만큼 이번 군함도 표결 패배를 계기로 당시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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