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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미국 뉴욕의 유엔대표부에 파견나갔던 국가정보원 간부들이 전직 운전기사로부터 거액의 배상 소송을 당했습니다. 개인 심부름에 동원하는 등 이른바 '갑질'을 당했고, 초과 근무를 하고도 제대로 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다투겠다던 국정원은 4년 만인 지난 4월 조용히 합의금을 물어주고 소송을 끝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운전기사 갑질' 국정원 공사들, 결국 합의금 지급

지난 2016년, 미국 뉴저지에 사는 한국계 영주권자인 남 모 씨는 미국 내 한국인들의 정보 공유 웹사이트 '헤이 코리안'에서 구인 공고를 봤습니다. 주유엔 한국대표부 소속 행정 보조원으로, 관용차를 운전할 기사를 구한다는 공고였습니다.

미국 뉴저지 고급 주택가의 옛 국정원 공관. 올해 1월 290만 달러에 매각됐다.

그해 7월부터 남 씨가 실제로 맡은 일은 국정원에서 파견 나온 공사급 간부의 개인 운전기사 역할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뉴저지 테너플라이의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국정원 공관에서 공사를 태워, 뉴욕 맨해튼의 유엔대표부 건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남 씨의 업무가 시작됐습니다. 근무 시간은 만찬 등 일정에 따라 주당 평균 62시간까지 늘어났습니다.

운전기사 남 씨는 국정원 공사들의 부당한 업무 지시가 잦았다고 폭로했습니다.

일례로 남 씨는 자신이 모시던 국정원 A 공사는 불륜에 관용차를 이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술은 구체적입니다. 지난 2018년 3월 남 씨는 A 공사를 태우고 맨해튼의 고급 한식당에 방문했습니다. A 공사는 여기에서 한 여성과 식사를 하고 나와, 자신에게 여성을 함께 태워 그녀의 집까지 운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남 씨가 법원에 제출한 소장엔, A 공사가 해당 여성과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육체적 접촉'을 이어갔다는 낯뜨거운 표현도 등장했습니다. 남 씨는 A 공사가 여성의 집에 '점검할 게 있다'며, 집안에 다녀올 때까지 관용차를 대기시켰다고 전했습니다.

남 씨는 또 후임인 국정원 B 공사 역시 관용차를 사적으로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내와 친구들의 맨해튼 명품 쇼핑을 도울 것을 지시하고 개인적인 골프 라운딩과 딸의 공항 '픽업'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남 씨는 여러 번 유엔대표부에 공식 항의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운전기사 남 씨는 2021년 6월 해고됐습니다. 남 씨는 직후 그동안 모은 자료로 뉴욕 남부지방법원에 유엔대표부와 국정원 공사들을 상대로 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초과 근무 수당도 다 못 받았고 사실상 공사들과 그 가족들의 집사로 일하며 차별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남 씨측은 이는 뉴욕시 인권법 위반이고, 따라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정원 공사들과 가족 집사 역할‥차별과 괴롭힘 당해"

미국 사법시스템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재판 기록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소송 제기 사실이 현지 언론에도 보도됐습니다. 은밀히 해외 정보활동을 해야 할 국정원 공사들의 부끄러운 행태가 외부에 공개됐습니다. 국정원이 쓰는 공관 위치도 노출됐습니다.

사실 국정원 공사 전용 운전 기사라는 존재 자체가 기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재외공관장인 대사급에만 '기사 딸린 차'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공사급 외교관은 대상이 아닙니다. 규모가 큰 외교 공관인 유엔대표부에는 대사 바로 밑에 2명의 차석 대사가 근무합니다. 이들 역시 별도로 운전 기사 및 개인 차량을 지급받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유독 국정원은 차석 대사보다도 한 단계 낮은, 공사급인 파견 간부에 대사급의 복지 혜택을 제공해왔던 것입니다. 알고보니 차량 관리, 운전기사 관리 역시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해왔던 상황이었습니다. 기사 계약도 공사 개인 명의로 이뤄졌습니다. 정보기관의 특성상 밀행성이 중요하고, 따라서 '기사 딸린 차'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밀행성은 역으로 내부 감시가 허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운전 기사를 집사처럼 부리거나 가족 행사에 사적으로 남용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벌어진 것입니다.

1심 2억여 원 배상 판결‥공사들은 소송서 제외

1심 재판부는 지난 2023년 2월 요약 판결(Summary Judgment)로 남 씨 손을 들어줬습니다. 요약 판결은 소송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실관계 다툼이 없는 쟁점에 대해 재판부가 신속히 판단을 내리는 제도입니다. 재판부는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노동법 위반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봤습니다. '52시간 근무제'를 이유로 52시간 상한을 넘어선 초과 근무에 대해선 수당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측은 급여 지급 기록조차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현금으로 지급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배상금과 이자 등 19만 달러, 약 2억6천여만 원을 남 씨에게 우선 배상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개인 집사처럼 부리는 등 괴롭힘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선 기각하지 않고 정식 재판을 계속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사건은 외교부에서 담당하지 않고 온전히 국정원이 맡아 진행했습니다. 국정원측은 사실 관계를 다투기보다 법률적으로 관할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유엔대표부는 외국 정부인 만큼 '외국주권면책법'에 따라 미국 법원의 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운전기사 고용은 외교관이나 공무원 고용과 달리 '상업적 활동'이고 이 경우 외국 정부라도 해도 면책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망신도 망신인데, 졸지에 나랏돈으로 큰 돈을 배상해줘야 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외교관 신분으로 면책 특권이 있는 국정원 공사 개인들이 배상 주체에서 빠지면서 유엔대표부의 책임만 인정됐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측은 즉각 1심 요약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당시 이 사실을 보도한 MBC에는 "항소심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어떤 답변도 할 수 없다"고만 밝혔습니다.

국정원, 합의문에 '비밀유지' 넣고 "이유 말 못해"

항소심을 맡은 미국 제2순회 항소법원은 지난해 9월, 1심 요약 판결을 일부 뒤집었습니다. 남 씨는 의전 차량을 모는 과정에서 기밀에 노출될 수 있었고, 또 별도로 보안 각서를 쓴 점을 볼 때, 남 씨의 고용이 '정부 활동'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1심 재판부가 사실 관계를 더 심리해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항소심 결정은 남씨 고용이 온전히 상업적 활동인지, 아니면 고유한 외국 정부의 활동인지를 더 따져보라는 취지입니다. 상업 활동이라면 배상을 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 배상 책임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돌연, 1심 재판부의 추가 심리가 시작되지 마자 국정원측은 합의를 추진합니다. 미국 재판기록 시스템을 확인한 결과, 양측은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쳐 지난 4월 법원에 합의서를 제출하고 소송의 자발적 기각을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송이 합의 종결 되면서, 결과적으로 공사들의 갑질에 대해선 판단이 내려지지 못했습니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갑질'이 있었다는 남 씨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인 집사 활동', 즉 갑질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목했는데, 사건이 종결되면서 조사 자체가 무산됐습니다. 법원의 사실 조사 과정이 외부에 공개될 경우 외교적 부담이 더 커진다는 점을 국정원측이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 기록상 운전기사 남 씨의 거주지.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으로, 얼마의 합의금을 세금으로 지급한 것일까요?

일단 유엔대표부는 구체적 소송에 관여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는 입장입니다. 돈을 받은 남 씨 측도 함구했습니다. 재판 기록에 있는 운전기사 남 씨의 주소지로 찾아갔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간 뒤였습니다. 어렵게 남 씨의 변호인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남 씨 변호인은 "모든 것에 '컨피덴셜', 즉 비밀유지 조항이 들어있다"며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다만, 국정원 측이 지급한 합의금이 만족할 만한 수준인지에 대해선 "노코멘트"라고 했습니다.

국정원에 "합의 종결을 선택한 이유, 합의 액수와 소송비용, 그리고 이를 지출한 예산 항목"을 공식 질의했습니다. 특히 합의서에 굳이 비밀유지 조항을 넣은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 측은 모두 밝히길 거부했습니다. 국정원은 "원고측과 합의한 것은 사실이나 구체 내용은 당사자들간 합의 조항에 따라 밝힐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갈음했습니다. 비밀유지 합의문을 작성한 당사자인 국정원이, 비밀유지 조항을 이유로 답변을 거부한 것입니다.

여전한 비밀주의‥"국민의 투명성 요구에 부합해야"

처음부터 비밀리에 국정원이 '기사 딸린 차'를 운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미국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을 수 있을까요?

외교부에서 배포하는 공관 근로자 표준 근로 계약서에는 "주재국 노동법령을 반영한 계약서를 체결하라", "행정직원 근로시간은 공관 운영시간과 동일하게 설정하라"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외교부를 거치지 않고 주먹구구로 채용이 이뤄지면서 이 사건에선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또 국정원 공사들의 관용차 사적 이용과 갑질을 단지 개인적 일탈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관행적인 비밀주의 탓에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반복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정원이 최종 합의 내용까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는 것을 합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공개해야 감시할 수 있고, 감시해야 재발하지 않습니다. 이종석 신임 국정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민주적 투명성을 요구하는 국민 목소리에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나세웅 기자(salto@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5/world/article/6734944_367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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