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가 3세대 아이돌 시대에 바치는 헌사 케이팝>
[박정빈 기자]
당신이 사랑한 케이팝은 언제였는가?
16살의 어린 소녀 보아가 일본 열도를 뒤집어 놓던 2002년?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각축전을 벌이던 2008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전세계가 말춤을 추던 2012년? 방탄소년단이 케이팝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점령한 2020년? 그야말로 '온 세상이 뉴진스' 였던 2022년?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서구권의 케이팝 팬들에게는 '3세대 아이돌' 시대로 불리는 2010년대 중후반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케이팝이 전통적인 타깃 시장이었던 아시아를 넘어 유럽, 남미, 북미 등 더 넓은 세상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내 최애의 영상을 언제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게 만들었고, 대륙의 경계를 넘은 글로벌 케이팝 팬덤의 형성을 촉발했다.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 팬이 영어 자막을 입혀 만든 <달려라 방탄>(방탄소년단의 웹 예능)의 해적판 영상, 친근하고 유쾌해 보이는 두 아저씨가 진행하던 하얀 배경의 <주간 아이돌>, 자막이 없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최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던 저화질의 브이앱 라이브까지. 지금처럼 글로벌 팬덤을 위한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아 다소 불편하고 번거로웠지만, 그렇기에 더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 '덕질' 경력이 오래된 서구권 케이팝 팬이라면 누구나 그 추억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3세대 아이돌 시대에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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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
ⓒ 넷플릭스 |
넷플릭스 영화 부문 41개국 1위를 기록하며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바로 그 3세대 아이돌 시대에 바치는 애정어린 헌사다. 작중에서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가 출연하는 예능은 어떻게 보아도 정형돈과 데프콘의 <주간 아이돌>이며, 3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트와이스의 이름과 노래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3세대 아이돌 시기의 향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와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에 진입하는 등 일약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은 2010년대 중후반의 추억들이 집대성된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와도 같다. 그 예시로,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의 '데일리 톱 송'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뛰어난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는 '사자 보이즈'의 < Your Idol >을 살펴보자. 웅장한 콰이어와 역동적인 편곡, 넓은 공간감이 돋보이는 이 곡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엑소의 데뷔곡 < MAMA >를 쉽게 연상시킨다. 이외에도 에이티즈, 빅스, 스트레이키즈, 몬스타엑스 등 어둡고 강렬한 음악을 주로 선보여 오던 여러 3세대~3.5세대 보이그룹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난다. 3세대 보이그룹이 주로 출연한 Mnet의 경연 프로그램 <킹덤:레전더리 워>에서도 비슷한 편곡 기조의 무대가 다수 발견된다.
반면 극중 사자 보이즈의 데뷔곡으로 나오는 < Soda Pop >은 전형적인 트로피컬 하우스 트랙으로, 2010년대 중후반 케이팝의 트로피컬 하우스 열풍을 상기시킨다. 태연의 < Why >를 비롯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청하, 아스트로 등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아이돌들이 선보였던 트로피컬 하우스는 특유의 청량감으로 케이팝신을 장악했던 바 있다. 그 시절의 미감이 묻어나는 사자 보이즈의 알록달록한 의상과 함께, < Soda Pop >은 장르의 매력을 고스란히 복원한 플럭 사운드와 상쾌한 휘파람, 달콤한 멜로디로 우리가 트로피컬 하우스와 함께 보냈던 그때 그 여름의 기억을 불러낸다.
한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루미가 소속된 걸그룹 헌트릭스의 < How It's Done >과 < Takedown >은 블랙핑크를 필두로 한 2010년대 후반 걸그룹들의 '걸크러쉬' 사조와 판박이다. 있지, 에버글로우, 밴디트 등 3.5세대 아이돌부터 배드빌런, 픽시, 크랙시 등 현재의 4세대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걸크러쉬 콘셉트는 일반적으로 트랩 계열의 힙합/EDM, 큰 낙차의 구성, 래핑의 높은 비중 등 알기 쉬운 음악적 특징들을 공유한다(K/DA의 "POP/STARS"나 블랙핑크의 "The Girls"는 이러한 '걸크러쉬 계열 음악'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들이다). 헌트릭스의 곡들 역시 이러한 요소들을 빠짐없이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에서 살짝 벗어나는 곡인 헌트릭스의 < Golden >은 누구나 그 레퍼런스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브의 2023년작 < I AM >이다. 사용된 악기의 질감부터 하이노트를 잔뜩 박아넣은 고난이도의 탑라인까지 여러모로 닮아있는 지점이 많다. 수록된 곡들 중 유일하게 4세대 아이돌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곡이지만, 강렬한 고음역대의 보컬을 강조하는 맥시멀한 프로덕션이 특징인 <I AM >이 '4세대 중 가장 3세대스러운' 노래임을 감안하면 다른 곡들과 그 지향점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가 '옛 추억의 재현'에만 매몰된 것은 아니다. < How It's Done >에서는 최근 세계적으로 핫한 장르인 베일리 펑크의 리듬을 부분적으로 차용했고, < Takedown >에서는 2020년대에 유행한 신스웨이브 음악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단순한 과거의 재현을 넘어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2010년대의 케이팝을 호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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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
ⓒ 넷플릭스 |
이러한 측면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근본적 아이디어는 또다른 넷플릭스의 히트작인 <오징어 게임> 시리즈와 궤를 같이한다. <오징어 게임>이 과거 순수하던 시절의 기억이 담긴 전통놀이들을 오늘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왔듯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서구권 케이팝 팬들이 사랑한 2010년대의 케이팝을 2025년에 다시 호명한다.
얼핏 확장성이 부족해 보이는 소재이지만, 중요한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과거 문화에 대한 애정과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정서다. <오징어 게임> 속 달고나 뽑기와 구슬치기가 한국인들만의 추억임에도 세계인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내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케이팝 팬덤을 넘어 전세계 대중에게 폭넓게 향유될 수 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창작자 본인이 사랑한 옛 문화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과 존중, 심도 깊은 탐구, 현대적 변용은 이제 K-콘텐츠의 세계화를 위한 하나의 검증된 방법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문화 콘텐츠의 진화는 결국 기억을 품은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다시 한 번 과거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법을 증명해 보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멈출 줄 모르는 흥행가도를,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또 한 명의 케이팝 팬으로서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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