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쓸데없는 간판의 정치경제학
안전 잡겠다며 수차례 조직 개편
정작 안전 소프트웨어 구축 뒷전
민방위복 색깔보다 실리 따져야
# 이재명 대통령의 민방위복을 두고 색깔 논쟁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이 전임 정부에서 제작한 초록색 민방위복이 아니라 예전의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어서다. 정부 관료들과 지자체장들은 어떤 민방위복을 입어야 할지 고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대통령은 "옷 바꾸려 예산 쓰지 말고 아무거나 입으라"고 했다. 초록색을 입든 노란색을 입든 국민의 안전만 지키면 그만이란 얘기인데, 실제로 민방위복을 교체하면 생각보다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전체 공무원 117만764명(2024년 기준)에게 민방위복을 교체ㆍ지급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소 359억원에서 최대 790억원의 혈세를 투입해야 한다.
# 실질적 효과나 예산을 감안했을 때 정부의 의지와 옷 색깔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특히 안전 문제는 그렇다. 초록색 옷이든 노란색 옷이든, 행정안전부든 안전행정부든 옷 색깔과 명칭을 바꾼다고 '없던 안전'이 생기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역대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는 과연 다른 길을 걸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은 것을 두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사진|뉴시스]
"실리實利를 추구하겠다." 역대 정부가 늘 강조해온 선언적 말이다. 어떤 정부도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겠다'거나 '실속보다 포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주장한 적 없다. 이런 정부를 국민이 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정부는 실리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하다 5년을 보냈다.
■ 이명박 정부 =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곧바로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재정경제부ㆍ기획예산처 등의 업무를 합쳐 기획재정부로, 국정홍보처ㆍ문화관광부를 문화체육관광부로, 건설교통부ㆍ해양수산부의 업무를 합쳐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로 바꿨다. 행정자치부는 중앙인사위원회ㆍ비상기획위원회 등과 합쳐 행정안전부로 바꿨다. 장관급 등 공무원 3500여명을 감축하기도 했다.
물론 조직 개편이 이상한 건 아니다. 시대에 맞게 명칭과 역할을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건 개편의 목적을 달성했느냐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가 행정자치부의 명칭을 행정안전부로 바꾼 건 안전을 강조한 조치였다. 당시 원세훈 행안부 장관은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 핵심 과업"이라면서 "숭례문 화재 등과 같은 후진국형 사고의 반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듬해인 2009년 1월 '용산 참사'가 터졌다. 생존권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경찰이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6명(철거민 5명ㆍ경찰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안전을 외친 정부가 되레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 셈이다.
2년 후인 2011년 8월엔 가습기살균제가 폐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온나라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보건당국이 역학 관계를 밝혀내기 전까지 총 23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78명이 사망했다. 그중엔 영유아는 36명이나 됐다. 이 과정에서 안전을 강조한 행정안전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효율을 강조하면서 규제 문턱을 낮춘 탓에 국민의 안전이 더 위협받기도 했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2015년 1월 발생한 경기도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사고다. 이명박 정부 때 안전시설 설치 의무를 대폭 완화(스프링클러 미설치)한 역효과가 박근혜 정부에서 터졌다. 이 화재로 5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다쳤다.
■ 박근혜 정부 = 박근혜 정부에선 달랐을까.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3월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유는 단순했다. 행정보다 안전을 더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를 두고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이름만 바꾼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지적이 곳곳에서 쏟아졌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바로 이듬해인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이 참사로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됐다. 구조자는 172명에 불과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허술한 선박 개조시스템과 정부의 안전관리 부실 등이었지만, 피해를 키운 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시스템이었다. 보고 시스템이 엉망인 데다, 대응속도마저 느렸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박근혜 정부는 2014년 11월 안전행정부를 다시 행정자치부로 바꿨다. 대신 안전처와 인사처를 분리해 국민안전처를 신설했지만, 누굴 수장에 앉히느냐를 두고 밥그릇 싸움만 하느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2016년 7월과 9월, 울산과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긴급재난문자는 늦게 발송되거나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먹통이 됐다. 2017년 5월 강릉ㆍ삼척ㆍ상주 지역이 산불로 뒤덮였을 때는 아예 긴급재난 문자가 발송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입으로만 안전을 강조한 결과였다. 일례로 박근혜 정부 시절 재난관리 예산은 2013년 9840억원에서 2014년 9440억원, 2015년 8610억원, 2016년 7830억원, 2017년 8040억원으로 연평균 4.9%씩 지속적으로 줄었다. 안전을 위한 내실은 전혀 다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 문재인 정부 = 문재인 정부는 어떨까. 문재인 정부는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이전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해외에서부터 'K-방역'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허점도 없진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7월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국민안전처에서 소방청을 분리ㆍ독립했다. 소방청에 권한을 더 준 셈이다.
하지만 내밀한 허점까지 메우지 못했다. 2019년 4월 강릉부터 동해까지 휘감은 산불은 국가직ㆍ지방직으로 구분된 '소방관 체제'가 대형 화재에 빠르게 대응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지역에 소방관이 모자랄 경우 국가직을 동원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2020년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소방관을 모두 국가직으로 전환한 건 다행이다.
■ 윤석열 정부 = 윤석열 정부는 이전 정부들과 달리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안전을 위한 내실도 다지지 않았다. 되레 안전 시스템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줄줄이 터져나왔다.
2022년 8월 폭우로 서울 일부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때,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은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운영됐다. 그때 윤석열 대통령은 홍수를 보면서 퇴근하고 있었다. 같은해 10월엔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159명이 사망하고, 195명이 다쳤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민방위복'의 색깔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기존의 노란색 민방위은 현장 활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2023년 8월부터 녹색 민방위복으로 변경했다.
'재난이나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현장 활용성을 높인 민방위복을 선택했다'는 건데, 이런 발상이 특별한 효과로 이어졌을 리 없다.[※참고: 규정에 따르면 무조건 변경할 의무는 없다. 다만 대부분의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민방위복 색깔을 맞출 가능성이 높다.]
자! 이제 정리해보자. 역대 정부는 집권만 했다 하면 '국민 안전'을 빌미로 뭔가를 바꿨다. 누군가는 조직을, 누군가는 옷을 바꿨다. 도대체 뭘 의도했는진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목적과 다르게 나타났다. 실효성이 없었다는 거다.
문제는 역대 정부가 뭔가를 바꾸는 데 상당한 예산을 투입했다는 점이다. 역대 정부가 조직 개편에 사용한 예산을 분석한 연구물은 없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최근 "기획재정부의 예산 기능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국회예산정책처가 그 비용을 추계했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총 476억5300만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연평균 95억3100만원 수준이다. 기재부가 정부의 핵심기구란 점을 감안하면 일반화하긴 힘들지만, 여러 부처를 동시에 개편할 경우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바꾼 '민방위복' 역시 마찬가지다. 조달청 나라장터에 따르면 올해 지자체들이 계약한 민방위복의 1벌당 가격은 최저 3만700원에서 최고 6만7500원이다. 우리나라 전체 공무원 117만764명(2024년 기준)에게 민방위복을 교체ㆍ지급하면 최소 359억원에서 최대 790억원의 예산을 써야 한다. '민방위복'을 입는다고 국민의 안전을 좀 더 세심하게 지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데 혈세를 써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민방위복 규정(민방위기본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2023년 제작 양식만 녹색으로 규정했을 뿐, 어떤 색깔을 입어도 무관하다. 노란색 민방위복이 쓸모를 다하고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녹색으로 입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2014년 신설된 국민안전처는 3년 만에 다시 사라졌다.[사진|뉴시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이전 정부의 민방위복과 다른 색깔의 민방위복을 입고 현장에 나타났다. 당연히 "민방위복 색깔을 원래의 노란색으로 바꾸는 것 아니냐" "이전 정부와 차별화하려 녹색 민방위복을 입지 않는 것 아니냐" 등의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 대통령은 "옷 바꾸려 예산 쓰지 말고, 있는 거 아무거나 입으라"면서 내실 없는 논란을 종식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에도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었다. 이게 정상이다. 이재명 정부가 '초록색 민방위복'을 폐기하고 또다시 노란색을 고집한다면 이들 역시 '비정상'으로 봐야 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초록색이든 노란색이든 안전만 지키면 그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까.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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