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바닷길에 세계 해상 석유 수송량 25% 통과
벌써 항로 변경·대체 항로 등 선박업계 예의주시
현실화되면 이란도 타격…中 "美 위기 초래" 규탄
[이데일리 김윤지 기자] “응징할 것이다.”
23일(현지시간)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전일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 이후 첫 공식 입장을 이처럼 내놨다. 이란을 선제공격한 이스라엘을 겨냥해 미국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으나 이란의 강경 대응을 시사한 것이다.
이란의 가장 강력한 보복 조치 중 하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다. 전날 이란 의회(마즐리스)는 자국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대응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의결했다. 최종 결정은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가 내릴 예정이나 대형 유조선 운영사 등 선박업계는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해상 운송 경로와 유류 수급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위기 고조에 대형 유조선, 항로 급변경”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페르시아만 방향으로 호르무즈 해협 초입에 들어서던 코스위즈덤레이크호, 사우스로열티호 등 초대형 유조선 2척이 전날 호르무즈 해협 초입에서 뱃머리를 돌렸다. 2척의 선박 모두 비어 있는 상태로 페르시아만 입구에서 남쪽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지난 13일부터 무력 충돌한 이후 이 해역에서 위치정보시스템(GPS) 장애 등 통신 이상 현상이 급증했으나 이번 항로변경은 신호 교란이 아닌 위험 회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2022년 당시 호르무즈 해협 인근 오만 만의 마크란 해변에서 군사 훈련 중인 이란군(사진=AFP)
같은 날 그리스 해운부는 자국 선박에 ‘호르무즈 해협 이동을 재검토하고, 이 지역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안전한 항구로 대피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스는 세계 최대의 유조선 보유국 중 하나다.
호르무즈 해협은 북쪽은 이란, 남쪽은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에 접해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길이는 약 160㎞이며,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은 약 33㎞ 수준이다. 실제로 선박 항로로 사용 가능한 구역은 왕복 6㎞ 너비 (각 방향 3㎞)에 불과하다.
이 좁은 바닷길은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UAE, 카타르 등 산유국들의 석유를 실어나른다. 전 세계 해상 석유 수송량의 약 25%가 이곳을 지나간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석유류(원유+석유제품)가 이 해협을 통과했다.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20%에 해당한다. 액화천연가스(LNG) 수출량도 막대해 전 세계 공급량의 5분의 1 이상이 이곳을 통과한다. 한국으로 오는 중동산 원유는 99%가 이곳을 지난다.
봉쇄시 이란·中 타격…美 “中 정부 나서길”
전문가들은 해협 봉쇄가 현실화된다면 국제유가 급등, 세계 공급망 불안정, 해운 및 보험비 급등을 예상하고 있다. 이라크,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등은 원유 수출에 있어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봉쇄시 이란 경제 또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SWP) 소속 연구원 하미드레자 아지지는 “이란이 전략적 차원에서 단기적인 경제적 희생을 감내할 수도 있다”며 “이 경우 이란은 사실상 유일한 수입원을 스스로 포기하고 국내 반발 여론에도 직면하고 국제적 평판에 장기적인 손상을 입을 위험도 감수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한국을 포함한 주요 원유 수입국들의 에너지 안보도 위협받는다. 이란 석유의 최대 구매자이자 이란의 주요 교역 파트너인 중국도 영향권에 포함된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CBS 방송과 인터뷰에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차단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고 분노할 나라는 중국”이라며 “해협 봉쇄는 자살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도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가능성에 대해 “중국 정부가 이란에 연락하기를 권한다”며 “중국은 원유 수입을 호르무즈 해협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와 관련해 미국을 규탄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GT)는 23일 사설을 통해 미국의 이란 핵 시설 공습이 중동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더 큰 위기를 촉발시키고 있며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차단되면 국제 유가는 급격히 급등할 수밖에 없으며 글로벌 해운 안보와 경제적 안정성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란, 美유조선 나포 확대 등 서방에 대응
이란은 오래전부터 미국 등 서방의 위협에 대응할 때마다 ‘해협 봉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란에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법적 권한은 없으나 해협의 지리적 특성상 이란이 봉쇄 작전을 펼치기 쉽기 때문이다.
해협의 수심이 얕아 대형 유조선들이 지나갈 수 있는 해로가 한정돼 대형 선박 대부분이 이란의 영해를 지나야 한다. 이에 선박들은 기뢰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이란 해안에서 발사되는 드론이나 미사일 등 공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란은 ‘림펫 기뢰’(잠수부들이 목표 선박 선체에 직접 부착), ‘계류 기뢰’(부력과 중력을 이용해 수면 바로 아래에 있다 접촉 시 폭발), ‘침저기뢰’(해저에 가라앉아 있다가 목표물이 접근하면 부상해 폭발) 등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란이 실제 호르무즈 해협을 전면 봉쇄한 적은 없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2011년 서방의 대이란 제재 등으로 당시에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가 고조됐으나 전면 봉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란은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위협을 가해 제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거나 분쟁의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1월 이란 해군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 유조선을 나포했다. 2023년에도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해협에서 파나마 국적 유조선을 나포했는데, 당시 미 해군은 지난 2년간 이란이 최소 15개 국적의 선박을 불법으로 나포했다고 지적했다.
김윤지 (jay3@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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