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씨너스:>

[김상목 기자]

1932년 10월, 목화 수확이 한창인 미시시피 농장지대로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이 돌아온다. 시카고에서 갱단의 일원이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술집을 차리기로 한 것이다. 백인 부자에게 제재소와 인근 토지를 구매하고 마을에 들러 물건을 산 형제는 그날 밤 바로 '주크 조인트' 술집을 개업하기로 한다.

형제는 오랜만에 그들의 사촌 '새미'와 재회한다. 그는 블루스 연주에 재능이 있지만, 통속음악은 부정한 것이라며 터부시하는 목사 부친과 갈등을 빚는 중이다. 그들은 함께 개업식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하루를 보낸다. 소문만 무성하던 형제의 귀환에 온 동네가 술렁인다. 여러 종류의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마침내 해가 지고 술집이 문을 연다. 인근 흑인들로 가득 찬 가운데, 형제가 데려온 블루스 음악가 '델타 슬림'과 새미의 연주는 한껏 흥을 끌어올린다. 그런 가운데 불청객이 갑자기 나타난다.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다.

믿고 보는 감독, 라이언 쿠글러의 다섯 번째 장편

▲  <씨너스: 죄인들> 스틸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씨너스: 죄인들>의 감독 라이언 쿠글러는 'MCU(마블 씨네마틱 유니버스)'의 일부인 <블랙 팬서> 감독으로 쉽게 떠올릴 테다. MCU 전에는 <록키> 시리즈의 성공적인 외전으로 수혈된 <크리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장르 영화 법칙에 정통한 흑인 감독쯤으로 여기기 딱 좋지만, 그런 감독의 시작점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장편 데뷔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제목처럼 오스카 그랜트라는 평범한 흑인 청년, 선량하다기보단 작은 사고도 저지르고 했어도 '공공의 적'이라 불릴 정도의 반사회적 범죄자와도 거리가 멀던 한 청년이 겪는 비극적인 하루를 시간의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현주소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이 영화로 감독은 신진 감독의 등용문인 미국 선댄스영화제 대상을 거머쥐고 곧바로 할리우드에 영입된다.

감독의 그런 기원을 살펴본다면, 이후 상업영화판의 주목을 받아 그가 작업한 후속작들에서 은연중에 느끼던 낯선 기운은 대부분 해명될 수 있다. <크리드>에선 무적의 흑인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 두 차례 혈투를 치르고, 후일엔 우정을 나누던 하층 백인 복서 '록키 발보아'가 친구의 아들을 만나 권투 트레이너로 성장을 돕는다. 아버지가 최후를 맞은 링에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뛰어든 청년 '크리드'의 일대기는 흑인의 긍지와 명예를 되새기며 시효를 다한 듯 보였던 <록키> 시리즈를 이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 뒤를 이어 1986년생, 고작 서른을 갓 넘긴 감독은 '블록버스터' 메가폰을 잡는다. 마블의 <블랙 팬서> 연출을 맡은 것이다. 아프리카 오지 구석에 알려지지 않은 흑인들의 소국이 알고 보니 세계 최강국이고, 전 국민이 '히어로' 수준의 무력을 가졌다는, 그 때문에 나라에 닥친 내부적인 갈등을 조명한 인상적인 이야기는 감독에게 최연소 전 세계 10억 달러 흥행감독이란 타이틀을 안겼다.

고립주의를 유지할 것인가, 강대국에게 여전히 억압받는 흑인 동포를 위해 전쟁을 불사할 것인가 같은 영화 속 가상의 국가 '와칸다' 속 논쟁은 자연스레 영화관 바깥 현실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후속편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외부 위협에 대처하는 와칸다 속사정과 함께. 그들의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상반된 방법론을 가진, 또 다른 비밀을 품은 국가, '탈로칸'이 최대 적수로 등장한다.

지금껏 간략히 살펴본 바대로, 라이언 쿠글러라는 '아프로 아메리칸(블랙 아메리칸)'이란 정체성을 강하게 지니되, 이를 흑인 문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 혼합과 경쾌한 호흡의 연출 솜씨로 조합하는데 이미 검증된 작가다. 그는 자신이 속한 민족이 현재도 여전히 처한 불평등과 차별을 잊지 않되, 이를 작가적으로 풀어내는 '스피커'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감독의 색깔이 데뷔작 이후로 가장 강렬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작업이 그의 최신작 <씨너스: 죄인들>이다.

상징과 은유로 재구성한 20세기 미국 흑인 '사(史)'

▲  <씨너스: 죄인들> 스틸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감독은 자신의 신작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1932년의 미시시피 델타로 잡았다. 이미 세상은 20세기, 바깥에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의 혼란이 들쑤시는 중이지만, 이곳 시골의 풍경은 지난 세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지평선까지 끝없이 뻗친 목화밭에선 흑인들이 목화를 따고, 마을 잡화점은 백인 출입 가게와 흑인 및 유색인종 출입 가게로 길을 마주한 채 '분리'되어 있다. 이곳 흑인들은 '노예' 신분에서 명목상으론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백인 대농장주의 플랜테이션에서 소작농으로 그들의 선조가 착취당하던 것과 같은 나날을 보낸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예고편에서 광고하던 공포 액션 스릴러는 언제 시작되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별개의 풍경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이들이라면, 그렇게 술집 개업을 앞두고 돌아온 '탕자'들이 옛 이웃과 친척을 만나는 장면 하나하나가 'Bulid-Up' 예열 과정임을 간파할 수 있다. 무심코 툭 던지는 대사, 스쳐 지나는 풍경과 소품이 모두 미국 역사를 아는 이들에겐 범상하지 않은 감흥을 새기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재회한 사촌 새미에게 두 형제는 장난스럽게 타지 생활은 어땠냐는 질문에 답한다. '거기엔 짐 크로 법은 없다'라고 말이다.

바다 건너 우리는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이란 내전 결과로 미국 남부에서 노예는 없어졌다고 배운다. 이후로 사회적 차별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론 종전 후 주둔하던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사실상 전쟁 이전으로 돌아간 것과 같았다. 법적으론 자유민이 되었으나, 노예주에선 온갖 악법 규정을 신설해 실질적으로 노예 신분을 존속한다.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문맹 심사'와 '인두세' 납부를 거쳐야 한다. 여전히 경제적 빈곤에 머물던 소작농 흑인에게 이는 사실상 시민권 행사를 봉쇄하는 조치다. 게다가 영화에서 내내 풍자하듯 '정당한 분리' 정책이 공공연히 차별을 조장한다. 백인과 흑인은 학교도, 버스 좌석도, 급수대까지 나뉘고, 흑인은 어떤 경우에도 이 금기를 넘을 수 없다. 사촌간의 안부에는 그렇게 '뼈'가 들어 있는 것이다.

'스모크' & '스택' 형제는 지긋지긋한 미시시피 시골을 떠나 북부 대도시로 향했다. 어릴 적 폭력의 멍에를 벗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악순환은 쉽게 지워질 수 없다. 형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최초로 결성된 흑인 전투부대에 속해 바다를 건너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시카고에서 금주법 시기 이권 항쟁을 벌인 마피아 조직에 가담한다. 그들의 명성(혹은 악명)은 고향까지 바람결에 퍼질 정도다. 손에 피를 묻힌 채 돌아온 형제의 인생 궤적은 여전히 남부 흑인들을 속박한 차별악법 '짐 크로우 법'을 피해 북부 대도시로 이주한 흑인 대이동을 압축하듯 표현한 장치다.

자신들 말마따나 짐 크로우 법이 없는, 백인이건 흑인이건 공평하게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와 대도시는 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총알받이로 소모되고, 여전히 백인 부자들이 정점에 군림하는 건 본질에서 다르지 않았다. 알 카포네의 갱단은 당시 미국 마피아에선 드물게 '돈'만 벌어오면 인종 구분 없이 동료로 받아들였다지만, '협력자'로 머물 뿐이다. 손에 피를 묻혀가며 돈을 벌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순 없는 법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술집을 연 건 그런 피로감에서다. 하지만 그들이 되돌아온 미시시피는 미국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와 흑인 차별이 횡행하는 땅이다. 그들을 둘러싼 체제가 혁파되지 않는 한 낙원은 없다.

현란한 장르 혼합 속에도 삐죽 튀어나온 메시지

▲  씨너스: 죄인들> 스틸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대체 흑인 주인공이 밤새 흡혈귀와 사투를 벌이는 공포영화에 왜 이리 설명이 많은지 푸념할 법하다. 하지만 정작 필자가 구구절절 늘어놓고픈 정보와 상징은 시작도 않은 판이다. 그만큼 <씨너스: 죄인들>은 장르물 가면을 쓴 20세기 흑인 역사물이라 해도 손색없다. 남북전쟁 시대에서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 시대로 진입하기 전, 전간기 흑인 역사가 영화에 온전히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모크 & 스택 형제는 장사 밑천을 갖고 고향에 돌아와 술집을 연다. 밑천은 트럭에 가득 실린 '아일랜드 맥주 & 이탈리아 와인'이다. 영화 배경은 1932년이다. 미국에서 '금주법'이 폐지되기 직전이다. 마피아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배경이 바로 밀주 유통이고, 술집을 연다는 건 공권력 매수와 무력이 전제해야 가능했다. 마치 21세기 흑인 갱들이 마약 사업에 달려든 것과 겹쳐보일 대목이다. 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진 영화를 따라가면 알 수 있다.

중반 이후 주인공들은 흡혈귀와 밤새 목숨 걸고 혈투를 벌인다. 그런데 흡혈귀 '클랜'은 역설적으로 인종과 종교, 성별 차이 없이 기억과 고통을 공유하는 평등한 공동체 형태를 띤다. 흡혈귀의 주장엔 일정한 논리가 있다. 그에 관한 판단은 차별철폐 운동 방향과 직결된다. 그렇게 아일랜드 맥주와 이탈리아 와인처럼, 백인 사회에서 최하층에 머물던 존재들이 노예나 다를 것 없는 흑인들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

혼란을 관통하는 건 '음악'이다. 우리는 종종 대가의 연주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한다. 새미는 1920년대 미시시피 흑인들이 아프리카 선조에 물려받은 리듬에서 탄생한 '블루스'에 재능을 가졌다. 그의 연주는 악마를 불러들였다. 흡혈귀 두목은 고향의 민요를 맛깔나게 부르며 출현한다. 자신의 조상도 땅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었다며 동료가 되라는 권유와 함께.

피가 튀는 속에도, 영화는 미국 흑인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그들이 창조한, 현대 대중음악 원천인 블루스로 시간의 강을 교차하게 만든다. 작품 속 60년 시차를 현존하는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 초창기 최후의 거장 '버디 가이'가 깜짝 등장해 감당해낸다. 그 인상적인 마무리를 보고 있자면, 이 장르적 접근이 사회문제 은유에 최상의 조합 이란 판단이 절로 들 테다.

<작품정보>

씨너스: 죄인들
Sinners
2025｜미국｜공포 외
2025.05.28. 개봉｜137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각본 라이언 쿠글러
주연 마일스 케이턴, 마이클 B. 조던
배급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