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안녕120’ 상담 중장년 59%
국민 사회적 고립도 ‘남성>여성’
작년 자살 사망자, 남성이 2배
50대 21%로 최다…40대 19%
성공후 허무감·퇴직 등 겪은 중년
체면 따지는 남성문화 외로움 키워
서울시가 운영하는 ‘외로움안녕120’ 상담 결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중장년 남성이 많았다. 외로움은 자칫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포대교에 설치된 ‘한 번만 더’ 동상 모습 [연합]
통화가 연결됐지만 침묵이 한동안 계속됐다. 울먹임이 이어지고, 울음소리는 곧 통곡으로 바뀌었다. “선생님, 더 우세요. 저희가 기다리겠습니다.” 상담사의 말에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중년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 “제가 주책이네요. 너무 외로워서 전화를 했습니다. 괴로운데 말할 곳이 없네요. 30년 가까이 일했던 직장인데, 명예퇴직을 당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많이 생각 나네요. 너무 무기력합니다.” 서울시가 지난달부터 운영을 시작한 ‘외로움안녕 120’ 센터에 접수된 50대 남성의 사례중 하나다.
대한민국 중장년이 외롭다.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남성이 더 많은 만큼, 관계 속 고독감을 호소하는 중장년 중에서도 남성이 더 많다. 실직을 했거나, 이혼을 했거나, 자녀문제로 고민을 겪거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 중에도 중년 남성은 여성을 압도한다.
서울시가 지난 4월부터 운영에 들어간 ‘외로움안녕120’ 접수 상담 3088건 중 외로움 대화는 1394건(45.1%)으로 연령별로 보면 40대 이상 중장년이 59%로 가장 많았다. 외로움안녕 120센터 상담사는 5일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연령별 통계는 집계하지는 않지만, 체감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조금 많다”며 “처음에는 쭈뼛쭈뼛 거리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친구처럼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는다. 대부분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외로움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여성보다 남성이, 나이들수록 더 외로움 느껴”=통계개발원이 지난해 2월 발표한 보고서 ‘국민 삶의 질 2023’을 보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먹은 사람이 ‘외로움’을 더 느끼고 있었다. 통계개발원은 외로움을 ‘사회적 고립도’로 표현했다. 이는 ‘집안일 부탁’ ‘이야기 상대’ 둘 중 하나라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다. 이 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사회적 고립도는 33.0%로 나타났는데 여성(31.0%)보다는 남성(35.2%)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 연구의 바탕이 된 2021년 통계청 ‘사회조사’를 보면 연령 대비 교류하는 사람 수는 반비례하고 있다. 40~60대 중장년의 경우 배우자와 고민을 나누는 비율은 10% 미만이었다. 하루 중 대화 시간도 1시간 미만인 부부가 과반수였다.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중년 남성도 많았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사망자 중 남성은 1만341명, 여성이 4098명으로, 남성이 2배 이상 많았다. 남성은 전년 대비 6.1% 늘었고, 여성은 3.1% 줄었다. 특히 연령대별로 보면 50대가 전체 자살 사망자의 21.0%로 가장 많았고 ▷40대(19.0%) ▷60대(16.5%) ▷30대(13.4%) 등의 순이었다.
이에 대해 황순찬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는 “남성들은 일자리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가 유지된다”며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고, 가족과 관계까지 나빠지면 이들은 대화할 사람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중년 남성이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는 초기에는 오히려 우울감이 높아진다”며 “사회적 위상이 하락되는 걸 인정을 못하고, 자기 처지가 여기까지 왔다고 비관한다”고 설명했다.
경제상황은 외로움의 주요 원인이다. 중년 남성은 노후 준비와 자녀 부양의 부담을 동시에 느낀다. 이른바 ‘가장의 무게’다. 초혼 연령이 늦어지고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중년 1인 가구가 늘어난 것도 배경이다. 2020년 국토연구원의 연구를 보면 최근 10년(2008∼2018년) 동안 1인 가구 변화 추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50대 남성 1인 가구의 증가로, 증가율이 358%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중장년 남성이 압도적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국정감사에 제출한 ‘성별·연령대별 고독사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발생한 1만5066건의 고독사 중 40~60대의 비중이 72%로 가장 많았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아도, 특별한 사연 없어도 사회적 고립감”=외로움을 호소하는 남성이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살 만한’ 중년 남성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IT업계에서 전문직으로 근무하는 40대 중반의 한 남성은 최근 외로움안녕120에 전화를 걸어 “동창회와 소모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허전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 사람이 없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이 남성의 연봉은 6000만원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상황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한 한 60대 남성 역시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외롭다” “죽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현수 한양대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쉬운 소리 잘 못하고, 체면을 따지는 남성 문화는중년 남성이 외로움을 느끼는 배경 중 하나”라면서도 “특히 성공과 실패가 나뉘는 50대의 경우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주변을 차단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연구원 역시 2020년 발간한 보고서 ‘외로움은 개인만의 문제 아닌 사회적 질병’을 통해 ‘중년(40~50대)의 외로움은 성공 후의 허무감, 퇴직, 가정 내의 불화 등에 기인하며, 노년의 외로움은 은퇴, 자녀독립, 질병 발생 등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외로움을 느끼는 중년 남성이 많아지고, 자살과 고독사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늘면서 대책이 하나둘씩 마련되기 시작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10월 4513억원을 투입해 ‘서울시민 누구도 외롭지 않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서울시는 앞서 언급한 외로움 전담 콜센터 외로움안녕120뿐 아니라,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느끼는 시민 누구나 편안하게 방문해 소통하는 ‘서울마음편의점’도 지난 4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는 이미 외로움과 고립 문제를 ‘사회적 질병’으로 규정하고 대응 중이다. 영국은 2018년 ‘외로움 담당 차관’을 신설해 제도적 대응에 나섰고,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대책 담당실을 만들고 관련법을 제정하는 등 예방정책을 도입·시행 중이다. 우리나라도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박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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