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 출신으로 장애 판정까지 받은 李…고난을 원동력 삼아 사법시험 통과
盧 본받아 인권변호사 활동…성남시장·경기지사 역임하며 ‘사이다’ 강점 부각
사법리스크·테러도 막지 못했다…리더십 바탕으로 대권 3수 끝에 ‘인생 역전’
(시사저널=변문우 기자)
제21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선 후보가 6월4일 선거대책위원장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당사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60일의 치열한 대선 레이스 끝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마침내 대권을 쥐었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의 그간 인생 서사에는 수많은 굴곡이 담겨 있다. 흙수저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며 '등용문'을 이뤄냈다. 이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며 '사이다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그의 정치 인생에 '사법리스크'와 '죽을 고비'까지 찾아왔지만 끝내 역경을 이겨내고 리더십을 지키며 삼수 끝에 대통령직에 오르게 됐다.
'흙수저' '소년공' 이재명의 등용문 일기
이재명 당선인은 자신을 '흙수저'라 소개해왔다. 그는 1964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화전민이었던 가족은 겨울이면 방안에 둔 물그릇이 얼 정도로 찌들게 가난했다고 한다. 1976년 성남으로 이주하면서 가출했던 아버지와 다시 합쳤지만 온 가족이 먹고살기 위한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 당선인도 최근 펴낸 에세이에서 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첫 문장부터 '나의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중학생 시절 성남 오리엔트 시계공장에서 1979년부터 2년간 소년공으로 일했다. 당시 공장 프레스기에 팔이 끼며 비틀어지는 바람에 장애(6급) 판정을 받게 됐다. 이때 그는 두 번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난을 원동력으로 삼아 밑바닥 삶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했고, 결국 검정고시를 거쳐 1982년 중앙대 법대생이 됐다.
이후 사법고시까지 합격한 그는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했다. 사법연수원생 시절 성적이 좋았음에도 그를 인권변호사로 이끈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변호사)의 강연 때문이었다. 이 당선인은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민변·참여연대)의 길을 걸으며 점차 정치의 길로 입문하게 됐다. 2006년 성남시장(열린우리당 후보)과 2008년 국회의원(통합민주당 분당갑) 선거에 도전했지만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내외의 20대 시절 모습 ⓒ성남시청
'성남시장·경기지사' 발판으로 중앙정치 등극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해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55.1%의 높은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했다. 당시 이 당선인은 6500억원에 달하던 성남시 부채 문제를 해결해 주목을 받았다. 특히 본인 어린 시절 받지 못한 혜택을 돌려주기 위한 차원에서 '무상복지 3종 세트'(청년배당·무상공공 산후조리원·무상교복) 정책을 들고 나와 호평을 받았다.
중앙 정치와 관련해서도 각종 '사이다' 발언으로 인지도를 쌓아갔다. 본인의 보편복지 정책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단식농성도 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이 당선인의 몸값은 더욱 올라갔다. 이때부터 차기 대선후보 2위를 기록하며 대권 가도에 올라타게 됐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경선에서도 문재인·안희정 후보에 이어 득표율 21.2%를 얻으며 이름을 톡톡히 알렸다.
이후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56.4%를 얻어 당선됐다. 이때 이 당선인의 주요 공약은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실현, 지역화폐 유통, 통일경제특구 추진, 직접 민주주의 확대 등이었다. 특히 그는 이때 본인의 시그니처였던 '기본 시리즈'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또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방역 지침에 협조하지 않은 신천지 교단을 상대로 강경 대응하며 '사이다'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다만 이때부터 이 당선인의 사생활 논란부터 사법리스크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 받으며 첫 고비를 넘겼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제21대 대통령 당선인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24년 8월18일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열린 전국당원대회에서 당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당기를 흔드는 모습. ⓒ연합뉴스
尹에 졌지만 리더십 그대로…총선 압승으로 '1강' 구축
그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당내 대권 유력 후보들이 무너지면서 자연스레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결국 그는 2021년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의 혈투 끝에 대선 경선에서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경선 과정에서 이 전 총리가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그의 20대 대선 낙선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 당선인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포인트 차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이 당선인은 대선 패배 직후에도 쉬지 않고 곧바로 등판했다. 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서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이끈 것은 물론,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첫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다. 이어 그는 당의 구심점 역할이 없는 상황 속에서 2022년 8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에 오르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당 체제를 본인 중심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선인이 당대표를 맡은 시절에도 위기는 수차례 찾아왔다. 윤석열 정부에 맞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으나, 당시 본인의 사법리스크로 인해 2023년 9월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가결돼 코너에 몰렸다. 하지만 법원에서 영장기각 결정을 내리며 그는 위기를 탈출하게 됐다. 특히 그는 총선 정국이었던 2024년 1월 부산 현장에서 목에 칼을 찔리는 습격까지 당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해당 순간을 여러 자리에서 회고한 바 있다.
이 같은 역경들을 이겨내고 같은 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범야권 192석이라는 압승을 거뒀다. 특히 소위 '비명횡사' 공천을 통해 민주당 대부분을 친명(親이재명) 계파로 채우며 본인의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이후 본인의 경쟁 상대였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같은 해 12월3일 사상 초유 비상계엄 사태를 벌이면서 이 당선인은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 '1강(强)' 체제를 만들게 됐다. 사실상 대항마는 부재했다. 그리고 결국 6·3 대선에서 '인생 역전' 서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시사저널 양선영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