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빗썸라운지 강남점에 설치된 가상자산(가상화폐) 현황 전광판에 비트코인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사진=임형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서울 마포구 한 고깃집.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만난 네 명의 친구들이 오랜만에 얼굴을 맞댔다. 직장인, 프리랜서, 창업가, 취준생. 각자의 삶은 달라졌지만 이들의 대화는 하나로 모였다. 바로 ‘가상자산 공약’.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이 내세운 가상자산 공약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이번 대선에선 코인 얘기가 많네. 다들 스테이블코인 얘기하던데?”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대찬(31)이 굽고 있던 고기를 뒤집으며 말을 꺼냈다.
“이재명은 청년 자산 형성 지원한다면서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만든다더라. 거래소 수수료도 낮추겠대.” 프리랜서 방송작가 윤희(30)는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뉴스 헤드라인을 보여줬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도현(32)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문수는 국민연금도 코인에 투자할 수 있게 하겠대. 1거래소-1은행도 폐지하겠다던데.”
“뭐가 됐든 난 그냥 잔고가 반토막 안 나면 돼.” 취업을 준비 중인 명석(29)의 말에 모두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가볍지만 그 속엔 무게가 담겨 있었다. 가상자산은 더 이상 변방의 이슈가 아니다. 지금의 청년에게는 자산 형성의 또 다른 수단이 됐다.
그래픽=송영 기자
◆가상자산 ‘제도’로 끌어오는 후보들
지난해 하반기 코스피 등 주식시장이 뒷걸음치자 가상자산 시장으로 투자자금이 대거 몰렸다. 가상자산에 친화적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비트코인에 관한 관심도가 오른 것도 영향을 줬다. 대장 격인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해 말 기준 9만2666달러로 지난해 6월 말 대비 52% 상승했다(금융정보분석원). 국내 가상자산 시가총액은 100조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말 가상자산 투자자 수는 1825만 명, 예치금은 10조7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보유금액은 지난해 10월 58조원에서 11월 102조6000억원으로 2배 가까이 불어났고 12월에도 104조1000억원으로 증가세를 이어갔다.
1800만 명이 넘는 코인 투자자 상당수는 중도층이 많은 2030세대다. 중도 확장이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화두인 만큼 코인 투자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주요 후보들의 공약 경쟁이 치열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공통적으로 가상자산 현물 ETF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을 기반으로 한 ETF의 국내 상장을 허용하겠다는 의미인데 현물 ETF 도입에는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보유가 전제돼야 한다. 변동성이 큰 가상자산의 특징 때문에 금융시장 안정성과 금융사의 재무 건전성에 미칠 영향이 우려되지만 양 후보 모두 이 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만큼 제도 도입 논의가 빠르게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앞서 지난해 1월 미국에선 현물 비트코인을 기반으로 한 ETF가 여럿 상장됐다. 현물 비트코인 기반 ETF 자산 규모는 현재 1200억 달러에 달한다.
대화는 진지해졌다. “ETF가 생기면 이제 코인도 진짜 제도권에 들어오는 거 아니냐?” 대찬이 물었다.
“맞지. 다만 제도화된다고 해서 모두가 이익 보는 건 아니잖아. 주식도 그렇듯이.” 도현이 냉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윤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불확실하던 시장에 기준이 생긴다는 건 환영할 일이야. 이제는 ‘도박’이 아니라 ‘투자’로 다가오니까.”
그래픽=송영 기자
◆스테이블코인, 대선 화두로
대화의 주제는 스테이블코인으로 옮겨갔다. 명석이 말을 이었다. “그 얘기 들었어?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임금을 받고 있대. 강남 일대에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실물 카드를 통해 결제되기도 한대.”
도현도 거들었다. “난 쿠팡에서도 결제했어. 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강남, 동대문 등에서 테더를 원화로 환전하는 사설 환전소가 있다고 들었어. 별도 원화 계좌 없이도 송금이 가능하다나봐. 환전 수수료도 없대.”
스테이블코인은 가격 변동이 심한 일반 가상자산과 달리 변동성이 적다. 미 달러화나 유로화 등 기존 화폐에 대응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테더’라고 불리는 USDT가 시초인데 달러에 일대일 비율로 연동된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중 가장 시장점유율이 높다. 테더는 발행 규모만 약 1400억 달러에 달한다. 발행사는 테더의 가격 안정성 유지를 위해 지난해 말 기준 현금성 자산(82.35%), 비트코인(5.47%), 귀금속(3.7%) 등 형태로 준비금을 보유했다. 현금성 자산의 79.83%는 미국 국채로 구성됐다. 1000억 달러가 넘는 규모로 미 국채 시장의 큰손으로 등극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달러 패권’ 유지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에 힘을 싣고 있다. 미 상원은 5월 19일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의 주요 대선후보들도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 후보는 5월 8일 경제 유튜버들과 만나 “가상자산 시장을 제대로 관리하고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시장도 조성해야 국부 유출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확산하면 원화 가치가 하락하고 소비자 보호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K팝, K웹툰 등 콘텐츠 산업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안착시키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스테이블코인의 용처를 행정 영역으로까지 확대하겠다는 밑그림도 그리고 있다. 예컨대 지역화폐처럼 결제할 때마다 10% 할인 적용, 지방세·공공시설료 납부 허용, 잔액 실시간 공개 등의 기능을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시스템에 내장하겠다는 식이다. 다만 일각선 원화 기반은 실효성이 낮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 후보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규율체계를 만들고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도적 기반 마련에 방점을 둔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2022년 스테이블코인을 표방한 테라·루나 사태를 언급하며 불법유통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신중한 접근을 주장한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스테이블코인 안에 들어갈 자산담보나 시장 리스크를 어떻게 감당할지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2월 1960만개였던 활성 스테이블코인 지갑 수는 올해 2월 기준 3000만 개로 증가했다. 1년 만에 53% 늘어난 셈이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도 지난 4월 기준 약 238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약 1580억 달러)보다 50.6%나 뛰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슬슬 마무리를 지었다. 이날 자리에서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누구의 공약이든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누가 더 많은 걸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제대로 설계했는지가 관건이야. 코인도 공약도.”
그래픽=송영 기자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Copyright © 한경비즈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