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인터뷰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에 연구 논문
만성질환 가족 갈등과 우울증 관계 밝혀
평범한 일반인일수록 갈등 못풀면 우울증 악화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만성질환 환자가 늘고 있지만 정작 정부의 역할은 안 보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에 만성질환 환자와 가족의 갈등 해결 방식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지난 3월 16일 소개했다. /미국 하버드대
오랜 투병엔 장사가 없다. 만성질환 환자는 건강한 사람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다. 환자의 고통은 금세 함께 사는 가족에게 전염된다. 만성질환 환자는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간병에 지친 가족과 자주 갈등을 빚는다. 사소한 말다툼이 방치와 폭력으로 번지기도 한다. 환자도, 가족도 우울감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만성질환 환자가 늘면서 간병에 지친 가족과 갈등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우울증을 낳고 있지만 정부의 역할은 잘 안 보인다”고 말했다.
만성질환은 한때 선진국병으로 불렸다. 과도한 영양 섭취, 서구화한 식단, 운동 부족이 가져온 부자 나라에서나 걸릴 법한 질환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만성질환이 국내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건 벌써 50년 가까이 됐다. 박 교수는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서 급성 질환보다 만성질환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만성질환 환자가 늘고 있지만 정작 정부의 역할은 안 보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에 만성질환 환자와 가족의 갈등 해결 방식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지난 3월 16일 소개했다. /연세대 의대
먹고살기 힘든 시절, 의료는 당장 죽고 사는 환자에 집중했다. 한국 의료는 그 덕분에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병을 잘 고친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뇌졸중 치료나 위암 치료처럼 세계 1,2위를 다투는 분야도 몇 개씩 있다.
하지만 병에 걸리면 몸만 아픈 게 아니다. 환자 마음도 병이 든다. 아픈 몸은 영혼을 잠식하고 한 개인의 사회적 관계도 한순간에 망친다. 박 교수는 “한국 의료가 죽고 사는 건 그런대로 빨리 해결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 건강, 정서적 돌봄이 필요한 부분은 그동안 너무 외면했다”고 말했다.
정신 질환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만 봐도 그렇다. 적잖은 환자가 지금도 사회적 외면과 외로움 속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다. 간병 부담이 큰 만성질환도 마찬가지다. 오랜 간병에 지치고 경제적 부담에 생활고가 겹친 보호자가 환자를 숨지게 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간병 살인’도 심심찮게 보고된다. 박 교수는 “환자와 그 가족의 사회적 고립에 대해 우리 사회의 관심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만성질환이 어느 특별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고 혈관 탄력을 잃어버리면 30대에 15%이던 고혈압 발병률이 60대에 50%가 넘어간다. 당뇨 역시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지금처럼 돌봄 체계가 부족한 상황에서 고령 인구의 증가는 걱정스럽다고 했다. 노인 한 사람은 대부분 최소 2~3가지 질환을 앓고 있다. 최근 들어 만성질환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느끼는 부담에 대한 경고는 계속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대표적 만성질환인 치매 환자가 늘면서 환자 가족의 절반 가까이(45.8%)는 돌봄 부담을 느낀다는 결과를 공개했다.
박 교수는 자신도 고혈압을 앓는 만성질환 환자라고 했다. 하지만 일상으로 받아들인 자신과 달리 대부분 환자는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확연히 높다. 특히 몸도 아프고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가족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더 큰 우울감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오랜 기간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높은 상태로 살게 되면 환자처럼 정서적으로 고통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서로 이해하며 돌보기도 하지만 점점 무감해지거나 사소한 오해가 폭력으로 번지는 일도 있다.
박 교수는 군 위탁생인 주민정 연구원(육군 대위) 등과 지난 3월 16일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에 간병이 장기화하면서 환자와 가족의 갈등 해결 방식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를 소개했다. 연구진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고혈압과 관절염, 급성 질환, 당뇨병을 포함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32종의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 1만969명에게 가족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조사했다.
환자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47%)는 1년 전과 같은 갈등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가족과 관계가 이전보다 나빠졌다고 답했다. 가족과 갈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잦은 의견 불일치, 물건 던지기, 말싸움, 비난, 폭력이 대표적인 형태다. 가족과 갈등 해결 방법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거나 계속해서 가족과 갈등을 빚는 환자는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박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환자일수록 가족과 갈등에 취약하다”고 했다. 여성보다는 남성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 교육 수준이 높을 때 가족과 갈등을 잘 풀지 못하면 더 우울감을 느낀다. 평균 소득을 버는 사람,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 자신의 건강이 평소 양호하다고 생각하던 환자일수록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더 깊은 우울감에 휩싸인다.
특히 무심코 내뱉은 말과 신체 폭력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평행선을 달리는 말싸움과 가정 폭력을 접한 환자는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 교수는 “단 한 번이라도 부정적인 갈등 해결 방법을 경험한 환자는 가족과 계속해서 원만하게 지낸 환자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의 우울감을 보인다”고 말했다.
가족 간 소통과 협력, 지지는 우울증을 극복할 당장의 힘이 된다. 이런 긍정적인 갈등 해결 방법은 우울증 감소에 분명한 효과를 보인다. 차분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에게 모든 걸 맡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내 만성질환 환자는 14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박 교수는 “고령 인구가 늘고 만성질환 환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가족에게만 환자 간병의 모든 책임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일부 지자체에서 보건소를 통해 환자 가족 부담을 덜어주는 시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을 확대하고 주치의 제도처럼 의사한테 좀더 분명한 역할을 주는 방안을 논의해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환자와 간병하는 가족의 갈등은 불가피한가.
“고혈압이나 당뇨에 비해 뇌졸중 환자나 치매 환자는 잘 움직이기 어려워진 본인도 답답하고 간병하는 입장에서도 몹시 힘들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는데 케이크 한 조각 먹는다고 가정하자.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나. 당뇨는 훨씬 심하다. 후유증으로 눈이 멀고 발가락을 자르고 신장 투석까지 받아야 하니 불편하지 않겠는가. 함께 살고 있으니까 갈등은 많이 일어날 수 있다. 갈등 해소가 잘 안되면 우울감이나 다른 정신과적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해외에서도 만성질환 환자 관리가 문제가 되나.
“다른 나라도 만성질환에 걸린 다음부터 가족 관계가 좋아질 리는 없다. 만성질환은 가족 관계에서 위기다. 다른 나라도 몽땅 다 가족한테 다 맡길 수는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가 일부 책임을 맡고 정부가 부족한 자원을 제공한다. 종교 단체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만성질환 환자 관리를 잘하는 모범 국가 사례를 든다면.
“가정 주치의, 개인 주치의 제도가 있는 영국이나 북유럽이다. 다른 유럽 국가 중에도 영국 비슷하게 하는 나라들이 있다. 한국도 암암리에 단골 의사가 있는 환자가 있다. 하지만 주치의가 해야 하는 기본 임무는 주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은 관리 체계가 어떤가.
“몇 개 보건소에서 뇌졸중 걸린 환자 가족이 힘들어하는 걸 알고 환자를 하루 이틀씩 돌봐주는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하고 있다. 한국은 대부분 가족이 간병하는데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그래서 간병인들을 모아 여행도 시켜주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동네병원 중심으로 해서 관리를 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가족 안에서 갈등이 잘 해소가 안 되는 문화인 거 같다.
“세대별로 문화 차이가 뚜렷한 걸로 보면어조금씩 바뀌고는 있는 거 같다.”
-만성질환과 우울증의 관계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연구는 어디에 주목했나.
“만성질환으로 아프면 간병하는 가족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울증이 더 가중된다. 보통 만성질환 환자가 이 정도 우울증인데 가족과 관계를 망치면 얼마나 더 상태가 안 좋아지는지, 또 관계가 개선되면 우울증도 정말 개선되는지 살펴본 것이다.”
-가족과 관계를 잘 유지하려면 환자 마음가짐도 중요해 보인다.
“과거엔 고혈압 진단을 받으면 약을 안 먹는 경우가 많았다. 평생 먹어야 하는데 일찍 먹는 시점을 되도록 늦추고 싶어 했다. 매일 먹는 것도 부담이다. 하지만 비타민처럼 매일 하루에 하나씩 꼬박꼬박 먹겠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우울감이 생길 이유가 없다. 나 역시도 40대 초중반부터 고혈압이었는데 생각을 바꾸면서 우울하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일수록 가족과 갈등 해결이 잘 안될 때 더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는.
“갈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면 더 높이 물방울이 튀듯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더 쉽게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워낙 갈등을 겪는 일이 많으니 가족과 갈등이 그저 또 하나 추가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은 이런 갈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
오랜 간병에 지치고 생활고가 겹친 보호자가 환자를 숨지게 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간병 살인’도 심심찮게 보고된다. 박 교수는 “환자와 그 가족의 사회적 고립에 대해 우리 사회의 관심은 아직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의 간병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의료 제도가 있다면.
“아프리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사회가 돕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동네병원을 중심으로 주치의 제도를 고민해 보면 좋겠다. 의사들에게 역할을 주고 운영할 필요가 있다. 꼭 가정의학과만 할 이유는 없다. 하고 싶은 의사들을 모아 8시간 교육을 2~3번 해도 충분하다. ”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면 될까.
“몇 개 시범 사업을 해보고 성공한 모델을 확산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에 의료혁신센터를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아이디어가 타당하면 그다음 돈 주고 끌고 가면 된다. 우리는 무슨 시범 사업 하면 항상 정부 맨 위에서 하향식으로 내리는 게 문제를 만든다.”
-정부나 지자체가 무게를 둬야 할 부분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몰입해서 해결하기도 하고 방치하기도 한다. 아픈 데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아픈 걸 잊어버린다. 환자를 돌볼 때도 즐겁게 사는 방법, 가령 운동을 함께 한다든가 가족이 간병 부담을 잠시라도 잊고 벗어날 방법을 찾아주는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만성질환은 환자 입장으로 주로 봤지만 이제 간병하는 가족들도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 지원이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고혈압이나 당뇨는 가족의 도움이 상대적으로 덜필요하다. 반면 치매나 뇌졸중처럼 거동이 심각하게 불편한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힘들다. 이런 환자 가족부터 도와야 한다.”
-모든 환자 가족을 지원하기 어렵지 않나.
“일부 만성질환은 사전에 관리만 잘 해줘도 상당수 환자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가령 관절염 환자는 먼저 치료를 잘 해주고 걷는 데 지장이 있더라도 계단에 보호난간만 있어도 도움을 안 받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것만으로도 가족 부담이 크게 준다.”
-혼자 사는 1인 가족 시대 만성질환 환자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가족이 돌보지 못하는 환자는 역시 사회가 맡아 돌봐야 한다. 국가가 일일이 모든 사람을 돌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국방과 외교, 경제를 맡고, 지자체가 동네 상권 문제 만큼 아픈 사람을 관리하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부는 지자체가 이런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깔아주고 지원해야 한다.”
-앞으로 좀 더 살펴볼 부분이 있다면.
“불안이다. 우울감과 불안감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공황 장애가 불안 장애 끝이다. 정신 질환 환자의 가족 간병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거의 사각지대에 있다.”
참고 자료
PLOS ONE(2025),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318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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