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과학자에게 묻다]
(7·끝) 한인 첫 美물리학회장 지낸 김영기 시카고대 명예교수
1899년 설립된 미국물리학회는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존 홉필드 프린스턴대 교수를 비롯해 리처드 파인먼, 엔리코 페르미 등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낸 세계 최고 권위 학회다.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역대 둘째로 미국물리학회장으로 선출돼 1년 임기를 최근 마쳤다. 김 교수는 지구와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미세 입자(粒子)를 연구하는 ‘입자 물리학’의 세계적 석학이다. 그를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는 126년 역사의 미국물리학회 회장 임기를 최근 마치고 본지에 “중요한 자리를 맡을 때마다 내 안에 깊게 새겨진 한국의 문화가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2022년 방한 당시 모교 고려대에서 입자 가속기에 대한 설명을 투명 아크릴판에 적고 설명하는 장면이다./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한 해 미국물리학회장을 지낸 소감은.
“물리학의 인적·학문적 저변을 넓히는 데 특히 집중했다. 과학은 국제 협력이 이뤄져야 좋은 성과가 나온다. 우리 학회가 19세기 말에 만들어졌을 땐 백인 남성 중심의 엘리트 성향이 짙은 단체였고, 순수 물리학을 하는 사람만 인정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지금은 다양한 학문이 엮여 새로운 학문이 만들어지는 시대다. 물리학을 기초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고, 산업을 일구는 사람들도 우리 학회와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억에 남는 성과는.
“학회의 지향점과 사명을 재정립하고, 핵심 가치와 행동 강령 등을 정리하는 일이다. 우리 핵심 가치에 ‘스피킹 아웃(speaking out·의견을 밝히다)’이라는 게 있지만, 무엇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처럼 국제 분쟁이 많으면 세계 곳곳 회원들이 학회에 목소리를 내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지지하면 반대편을 공격하는 게 되지 않나. 그래서 우리가 잘 모르는 분야에는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목소리를 내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대신 지난해 전쟁통에서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물리학 지도자들과 함께 차세대 물리학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이게 학회의 포용성을 높이고, 평화에 기여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런 성과가 기억에 남는다."
-행동 원칙이 명확해서 좋아진 사례는.
“예컨대 올 들어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 과학 기관 예산을 삭감한다는 사안에는 곧바로 우려한다는 성명을 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입자들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충돌시키는 ‘입자 가속기’ 실험으로 기본 입자 질량의 근원을 밝히는 데 공헌해 ‘충돌의 여왕(Collision Queen)’ 소리를 듣는다. 올해 미국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임시 소장을 맡고 있다.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얻은 비결은.
“성격이 일단 부딪치고 보는 스타일이다.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석사를 마칠 때까지 해외로 나가본 적이 없다. 영어를 잘 못했지만 ‘나가서 부딪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도 그랬다. 누가 봐도 쉽고 성과가 나오는 길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오래 걸리고, 임팩트가 있는 연구를 골라 ‘사서 고생’한 게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인 여성으로서 ‘유리 천장’을 느끼진 않았나.
“오히려 한국인이고 여성인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시대 변화에 맞춰 물리학도 변화해야 하는데, 나처럼 밖에서 온 사람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였다. 중요한 자리를 맡을 때마다 내 안에 깊게 새겨진 한국의 문화가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한국이라는 배경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사례가 궁금하다.
“시카고대 교수가 됐을 때 물리학과에 한국처럼 ‘망년회’를 하자고 했다. 구성원들이 무척 좋아하더라. 그게 전통처럼 자리 잡아 지금도 매년 열린다. 물리학과장을 맡았을 때엔 한국식 돌잡이 행사를 열었다. 교수나 학생의 아이가 돌이 됐을 때 12가지 직업을 상징하는 물건을 놓고 고르게 했는데, 부모들 표정이 얼마나 진지한지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과학 연구라는 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협력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정(情)을 쌓다 보니 다음에 함께 일할 때 훨씬 편했다.”
-어떻게 입자 물리학을 시작하게 됐나.
“대학 입학 후 이과대 야구단 선배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그 중에 물리학과 선배가 많았다. 그들을 통해 물리를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2학년 때 물리 전공을 선택했다.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우주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입자 물리가 너무 재밌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는 행복이 참 크게 다가왔고, 그 호기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여기까지 왔다.”
-한국에선 순수 과학을 하겠다는 학생이 드물다.
“경제적 압박감 때문이 아닐까. 또 대학 입시 특성상 물리가 좋은 성적 받기 어려운 과목으로 인식돼 물리를 하려는 학생도 많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론 한국 학생들이 ‘앎의 행복’을 실감하면 좋겠다. 어떻게 살아야 성공적인 삶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행복한 삶은 성공적인 삶이 분명하다. 한국도 개개인이 이런 행복을 추구하는 ‘여유’를 가질 때가 온 것 같다. 그런 여유 속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문화가 자리 잡길 기대한다.”
김영기 교수는
고려대 물리학과에서 학·석사, 미국 로체스터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클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3년 시카고 대학으로 왔다. 한인 최초로 시카고대 물리학과장(2016), 미국 물리학회장(2024)을 역임했다. 지금은 미국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임시 소장직을 맡고 있다.
☞입자 물리학
원자핵보다 작은 미세 입자의 성질과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 입자들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충돌시키는 ‘입자 가속기’를 이용해 새로운 입자나 물리 법칙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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