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파과>
[김동근 기자]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로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하며 산다. 특히 한국에서 나이는 일종의 서열이자 통제 장치처럼 기능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나이를 물어보고 형과 동생을 나누고, 50대가 넘으면 자연스럽게 "이젠 뭐..."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노화가 진행되니 체력도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보면 일단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간주해버린다. 요청받은 적 없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여긴다.
물론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들은 많은 걸 스스로 해내고 있다. 영화 <파과>의 주인공 '조각'(이혜영)은 그런 편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인물이다. 60대 여성 킬러라는 설정이 처음엔 낯설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삶과 리듬에 빠져들게 된다. 오랜 시간 킬러로 살아온 조각은 이미 전설처럼 불리는 존재다. 흰머리와 느린 동작, 굼떠 보이는 걸음. 하지만 그 안엔 본능으로 각인된 킬러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녀의 존재는 '노년'이 곧 '퇴화'라는 편견에 대한 아주 강렬한 반박이다.
[첫번째 감정] 조각의 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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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과> 장면 |
ⓒ (주)NEW |
차갑고 냉정한 킬러 조각은 처음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게 효율적으로 정리된 사람처럼 보인다. 일정한 루틴에 따라 움직이고, 임무가 떨어지면 묵묵히 수행한다. 감정이 배제된 일상. 주변엔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그저 살아있는 기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얼음처럼 굳어있다기보단, 차마 꺼내지 못하고 봉인해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시절, 버려졌던 조각은 한 가족의 도움으로 인간다운 온기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온기는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결국 그 가족은 조각이 몸담은 세계의 잔인함 앞에 희생된다. 조각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단절한 채 살아왔다. 영화 속에 간간히 등장하는 젊은 시절 조각의 모습은 현재의 회한과 대비되며, 그녀의 고요한 얼굴 아래 감춰진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은 조각에게 우연이 아니라 숙명처럼 주어진다. 과거에 지키지 못했던 존재들, 그 상실이 만든 후회와 책임감이 지금의 조각을 움직이게 한다. 느려지고 떨리는 몸을 이끌고도 다시 무기로 손을 뻗는 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는 지키기 위해서다. 조각이 킬러로서의 마지막 본능을 꺼내는 이건, 지금껏 놓쳤던 따뜻함을 다시 지켜내기 위한 본능적인 감정 때문이다.
[두번째 감정] 투우의 냉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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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과> 장면 |
ⓒ (주)NEW |
투우(김성철)는 조각의 과거를 비틀어 놓은 듯한 존재다. 실력은 탁월하지만, 감정은 없다. 그는 임무를 수행할 때 고통을 즐기고, 천천히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을 택한다. 빠르게 처리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전통적인 킬러들과는 달리, 투우는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철저히 파괴한다. 그래서 그의 등장은 언제나 긴장을 만든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조각과 투우가 마주하는 장면마다 영화는 정적 속의 긴장감을 뿜어낸다. 조각은 느리고 조용하지만 깊고 무거운 힘이 있고, 투우는 빠르고 날카롭지만 얕고 위험하다. 그 차이가 두 인물의 대화에서도, 움직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투우는 조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침없이 공격하지만, 조각 앞에서는 묘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한다. 조각이 만들어낸 따뜻함, 혹은 인간성이라는 감정이 그에게 위협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 투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그의 냉혈함은 이질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증오했던 조각의 따뜻함은 사실 그 자신이 가장 부러워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 질투처럼 일그러진 감정. 그래서 투우는 조각 앞에서 더더욱 날카로워졌던 것이다. 조각의 온기가 투우의 내면을 건드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완전한 괴물이 될 수 없었다.
[세번째 감정] 조각의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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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과> 장면 |
ⓒ (주)NEW |
60대가 된 조각이 어느 날 우연히 다친 강아지 앞에서 멈춰 서는 장면.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조각은 다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때 완전히 봉인해뒀던 감정이 다시 꿈틀댄다. 엄마를 잃고 방치된 가족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지키려 하는 감정은, 그녀가 사실 평생 원해왔던 것이었다. 가까운 사람을 갖는 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각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본래 따뜻한 사람이었다. 킬러가 됐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직업은 감정을 억눌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고, 그 억눌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르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 감정이 조각을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영화는 조각이 선택한 따뜻함이 결국 또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막진 못했지만, 그녀가 그 따뜻함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아주 정성스럽게 그린다. 그녀의 따뜻함은 결국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남는다. 킬러였지만, 누군가에겐 단 하나의 보호막이 되는 것. 그게 조각이 늦게서야 얻은 삶의 의미다.
이혜영의 귀환, 그리고 김성철의 발견
이혜영 배우는 <파과>에서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나이 들수록 선 굵은 연기가 더 강렬해지는 배우라는 걸 다시금 증명한다. 추격과 액션, 그리고 감정신 모두에서 흐트러짐이 없다. 단지 60대 여배우가 아니라, 이 장르를 압도하는 중심축으로서의 무게감을 가진다.
김성철 배우의 연기도 빛난다. 통제 불능의 냉혈 킬러를 연기하면서도, 그 안에 감춰진 감정의 결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두 배우의 대립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관객을 끝까지 몰입하게 한다.
<파과>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탄탄한 연출로 액션 영화의 재미를 충분히 보여준다. 민규동 감독은 기존작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액션을 선보이며, 장르적 확장을 꽤 잘 해냈다. 특히 음악과 사운드를 이용해 장면의 분위기를 극대화한 연출은 인상 깊다.
이 영화는 단순히 킬러 이야기나 복수극이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여성의 삶, 회한과 따뜻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본능까지 다루고 있다. 감정이 담긴 액션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파과>는 분명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연휴에 극장에서 보기에도 딱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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