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제대로 목숨 건 이혜영의 열연, 민규동 감독의 섬세한 연출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기억될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가 완성됐다. 원작 매력을 계승한 건 물론, 스크린 예술의 미덕과 가치까지 살려낸 웰메이드 리메이크. 텍스트의 여백에 생명력을 입힌 배우들의 찬란한 앙상블. 과몰입 서사, 끝장 액션, 여운과 위로까지 충만히 담아낸 영화 ‘파과’(감독 민규동)다.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에서 40여 년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 분)과 평생 그를 쫓은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 분)의 강렬한 대결을 그린 액션 드라마다. 구병모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각색했다. ‘허스토리 ’, ‘내 아내의 모든 것’,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장르의 연금술사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신작이다. 특히 레전드 킬러 ‘조각’으로 분한 이혜영과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로 변신한 김성철이 섬세한 감정과 강렬한 액션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여기에 연우진, 김무열, 신시아 등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들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파과’는 액션물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법한 고민, 삶을 관통하는 통찰을 담고 있는 휴먼 드라마다. 사람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은 떠올리고 고민해봤을 ‘나이듦’과 ‘인간의 쓸모’,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스크린에 옮겨진 ‘파과’는 캐릭터들의 기본적 설정과 이야기 구조는 원작을 따르고 있지만, 주요 캐릭터의 서사 디테일이나 액션신, 주변부 인물의 설정 등 영화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각색된 요소가 많다.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영화 ‘파과’만의 새롭고도 신선한 매력을 주고자 많은 고민을 기울인 흔적이 돋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과거 젊은 조각의 서사와 현재 조각의 시점을 주요 장면들에서 동시기처럼 교차 배치해 비선형적으로 펼친 독특한 연출 방식이다. 영화는 먼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업체 ‘신성방역’의 살아있는 전설이지만, 지금은 65세로 늙어 퇴물 취급을 받는 킬러 조각의 젊은 시절 서사로 문을 연다. 버림받은 소녀였던 설화(신시아 분)가 스승 류(김무열 분)를 만나 킬러 ‘손톱’이란 새 이름을 받게 되고 킬러 업계에서 살아있는 전설인 ‘조각’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65세가 된 현재 조각의 시점과 젊은 손톱 시절의 과거를 교차 배치해 감각적으로 전개한다.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2시간의 짧은 러닝타임에 완전히 담을 수 없는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한 전략이다.
주인공 조각은 한때 모든 킬러들이 존경하는 레전드 킬러로 여겨졌으나,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현재는 능력을 의심받고 퇴물 취급까지 받고 있다. 자신이 몸담은 ‘신성방역’ 사람들 뿐 아니라 지하철, 길거리 등 거니는 일상 곳곳에서 조각은 초라한 존재로 비춰진다. ‘무쓸모’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각은 무심하고 냉랭히 대처하지만, 몸 곳곳에 찾아온 노화의 흔적은 조각 자신도 인지하고 있다. 일거리가 잘릴까봐 병원도 몰래 다니고, 건강검진 결과를 숨기기 바쁘지만 나이듦과 함께 사라져가는 존재감, 빛바램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나이듦의 변화는 마음에도 찾아왔다. 과거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았을 죽임, 룰을 어긴 업체 동료의 제거는 물론, 무심히 지나쳤을 누군가의 사소한 호의에 조각은 감상이 예민해진다. 늙어 쓸모없어진 개의 상처를 치료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가 하면, 조건없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 분)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스승 류가 남긴 가르침, ‘지킬 건 만들지 말자’는 다짐마저 잊어버린 채, 조각은 강선생과 그만큼이나 따뜻한 강선생 가족의 존재를 마음에 품는다.
원작 소설은 텍스트로 주인공 조각의 내면 심리를 치밀하게 파고들지만 스크린에서 이를 구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혜영의 노련한 열연과 존재감, 김성철의 눈빛 열연부터 연우진, 신시아, 김무열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열연과 앙상블이 짧은 러닝타임에 다 담지 못한 정보의 공백을 빈틈없이 채운다.
‘파과’로 처음 액션을 소화한 이혜영의 변신과 몸을 던진 열연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뛰고 구르고 허공에 몸을 날리는 액션마저 이혜영이 연기하니 감정의 언어로 치환된다. ‘이미 베테랑’이란 찬사를 듣는 이혜영은 이 작품으로 또 한 번 배우의 성장에 나이 제한이 없음을 증명했다.
조각과 조각을 쫓는 30대 젊은 킬러 투우의 관계성과 서사가 영화에서 더욱 풍부해진 변화도 눈길을 끈다. 텍스트 원작에서 한 두 줄의 멘트 정도로 간략히 서술돼있던 조각과 투우의 과거 서사가 영화에선 훨씬 입체적이고 비중있게 묘사됐다. 김성철이 연기한 투우는 손실장(김강우 분)의 영입으로 ‘신성방역’에 새롭게 투입된 에이스 킬러다. 하지만 신성방역에 들어선 처음부터 투우의 관심사는 오로지 조각에 향해 있었다. 조각은 그를 동료로 인정조차 하지 않지만, 투우는 집요히 조각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또 강선생의 목숨을 빌미로 집요히 조각의 신경까지 긁어놓는다. 영화는 투우가 왜 그렇게 조각을 집착적으로 쫓아다니는지, 두 사람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설득력있고 섬세히 묘사한다.
조각과 투우의 애증에 가까운 관계성. 이들의 복잡한 감정선은 스토리에선 물론 이들이 몸을 격릴히 부딪히는 액션 시퀀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성철은 선배 이혜영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격한 감정신과 액션신을 소화한 것은 물론, 섬세한 캐릭터 해석 과 특유의 눈빛 열연으로 조각과 투우의 독보적인 과몰입 관계성을 완성했다. 뛰어나고 잔혹한 에이스 킬러이지만, 어린 시절에 갇힌 투우의 불안한 내면을 설득력있게 그려냈다.
현재 시점과 교차돼 잠깐씩 플래시백 형식으로만 등장하지만, 조각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나 신시아와 그의 스승 류를 연기한 김무열의 존재감도 인상적이다. 조각에게 스승 류와의 애틋한 기억을 소환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강선생’ 역의 연우진의 열연이 이 영화의 드라마적 완성도를 보탠다.
창작자로서 민규동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도 느껴진다. 조각과 투우의 강렬한 액션 대결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이 대립을 통해 각자상실의 과거와 직면하고 화해하는 과정까지 나아간 각색이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다. 각 인물의 감정선과 분위기를 공간, 사운드, 의상에까지 녹인 민 감독의 서정적 미쟝센 철학이 원작의 감동, 여운과 시너지를 발휘했다. ‘파과’는 오는 30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김보영 (kby5848@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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