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이제>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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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 |
ⓒ 엠엔엠 인터내셔널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레'와 '알렉스'는 오래된 연인이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한집에 같이 살며 올해로 15년째 커플이다. 이만하면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다.
그런 두 사람이 한밤중에 대화를 나눈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질척대며 다툴 법도 하건만, 이심전심 공감된다는 투로 두 사람은 시원하게 합의한다. 물론 15년의 세월을 정리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함께 살던 주거도 둘 중 하나는 독립해야 하고, 짐도 정리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당연하게 진행할 숙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알렉스가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연인인 알레의 아버지가 누누이 설파해온 지론을 실행해 보자는 것이다. 알레의 아버지는 만남보다 헤어짐을 기념해야 한다며, 두 사람이 헤어질 거라면 반드시 이별 파티를 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 왔다. 알렉스는 그 기억을 품고 있다 작별의 순간에 꺼낸 것이다. 잠시 논쟁이 오가지만, 알레도 이에 동의한다. 9월 22일로 디데이로 정하고 초대할 이들을 서로 나눠 연락하기로 한다.
물론 오래된 커플의 뜻밖의 이별 소식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그걸 파티 열어 기념한다는 아이디어에 주변 지인들은 경악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기묘한 파티는 점점 진행돼 간다. 이사할 집을 구하고, 세간을 정리하면서 점점 가까운 이들에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중이다. 이렇게 작별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오랜 로맨스의 종막
이별 기념 파티라는 황당한 설정에 처음엔 고개를 절래 흔들었지만, 보고 있자니 그럴싸한데 끄덕이게 되는 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다. 여전히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않는 사이가 되기 일쑤인 국내 현실에선 무척 참신한 제안인 셈이다. 짧건 길건 죽고 못 살던 연애가 끝이 나면, 대게 '기록 말살' 조치가 취해지게 마련이다. 선물 주고받은 것들 돌려주거나 당근에 내놓고, 알콩달콩 SNS 주고받은 메시지도 모조리 삭제하고 만다. 마치 그렇게 해서 한때 열렬했던 관계가 소멸하는 것처럼.
그러나 15년째 커플이라면 이제 그런 단계로 두 사람의 관계를 삭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별하기로 한 사실을 통보하자 알렉스의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로 흐느낄 정도다. 다시는 그런 상대 못 만날 것처럼 둘이 워낙 찰떡궁합이었기 때문일 테다. 실제로 알레와 알렉스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며 볼 것 몽땅 다 본 사이라 인간관계도 대부분 겹칠 정도다. 이웃집 노부부에게도 그들은 식만 안 올렸을 뿐, 당연히 부부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딱히 일방의 책임으로 헤어지는 상황도 아니다. 없던 셈 칠 수도 없는 관계라는 건 분명하다.
(정작 원 제안자인 알레의 아버지는 기억도 잘 못하지만) 알렉스의 제안에 알레 역시 끝내 수긍하는 과정은 짧지 않은 토론을 통해 결정된다. 초반부 내내 두 사람은 낮과 밤을 바꿔 가며 이미 합의한 결별의 대미를 장식할 이벤트를 놓고 심사숙고한다. 사실 이만큼 오래된 관계라면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한 법이다. 빨리 끓고 금방 식는 즉석 관계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가 사실 놓치는 지점을 영화는 차분히 되짚어주는 셈이다.
처음엔 뜬금없지만, 두 사람의 파티 준비는 진지하다. 기왕 저지를 거라면 근사하게 치르고 싶다. 친구들의 밴드도 재결성하게 만들고, 소품도 이것저것 준비해야 한다. 장소와 날씨, 장식도 챙겨야 한다. 뭐 좋은 일이라고 파티까지 하냐 싶어도, 15년의 같이 한 시간을 매듭짓는 데에는 더없이 정중한 도리 아닐까 생각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렇게 권태와 타성 때문에 결별에 동의한 이들은 의도치 않게 정리를 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연인들은 함께 한 시간이 워낙 긴 탓에 말하기 곤란한 어려움에 거듭 빠진다. 이제는 둘의 역할 분담이 너무 잘 조성된 때문에 막상 헤어지고 자립한다는 게 너무 불편하고 무서울 지경인 것이다. 둘의 보금자리엔 취향도 통하는 터라 벼룩시장에서 잔뜩 구매한 온갖 소품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일상조차 중단될 상황이라는 게 너무 낯설다. 마음에 드는 의자 세트를 낱개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보여주는 다음 대목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남는다.
로맨스를 넘어 인생의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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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 |
ⓒ 엠엔엠 인터내셔널 |
이 모든 사달의 출발은 무심코 던진 알레 아버지의 지론 탓이다. '파티는 헤어질 때 한다', 이 기묘한 철학은 실은 그저 농담으로 던진 것만은 아니었다. (감독의 부친이자 스페인의 거장 감독이기도 한 페르난도 트루에바가 연기한) 알레의 아버지는 이별과 파티를 알리러 온 커플에게 은퇴생활자인 본인이 탐독하는 근대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철학 서적을 권하며 자신의 주장이 품은 의미를 풀이한다. 국내엔 주로 후기 저작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소개되지만, 영화에선 그의 저작 중 전반기에 속하는, 게다가 가장 감성적인 서술이 돋보이는 <반복>에 깃든 함의를 주로 언급한 점도 흥미롭다.
물론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소화하기 위해 철학서를 탐독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현학적 인용을 초월하는 깊이를 맛보려 한다면 약간의 이해는 필수로 보인다. 실제 철학자의 생애에서 작품에 인용되는 사랑과 감정에 관한 구절들이 중요한 열쇳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차용인 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 동의할 테다. 물론 키르케고르나 니체, 쇼펜하우어 같은 서양 근대 철학자들의 계보와 사상사는 본 작품을 즐기는 데 양념에 불과하다.
영화인 가문의 풍요한 유산 속에 성장한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 역사에 관한 깨알 같은 팁도 풍성하다. 게다가 그저 정보 나열에 그치지 않고, '결정적 찰나'로 작용하기에 더 감동적인 부분으로 기능한다. 영화계에 관한 애착과 경험이 가득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후반부에 어떻게 화학적 결합을 이루는지 지켜보는 건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을 넘어 잉그마르 베리만, 하워드 혹스, 존 스터지스, 프랑소와 트뤼포에 이르는 세계 영화사의 고전 상식이 받쳐 준다면, 영화의 기본 전개와 이중의 축으로 흘러가는 숨은 골간을 체험할 수 있게 배려되는 구성이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다.
그런 영화계 안팎의 이야기들은 곁가지가 아니라 이별 파티 준비과정과 씨줄 날줄 종횡으로 엮이며 얼핏 심심하기 그지없는 줄거리의 행간을 흥미롭게 연결해 준다. (아마 두 사람 모두 깊이 흠모할) 트뤼포의 무덤이 갖는 함의는 영화광이 아니라면 체감하기 힘든 대목일 텐데, 그 장면이 갖는 의미는 영화를 보면서 발견하는 재미에 넘기려 한다. 다만 그 순간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라는 건 확실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기승전결 뚜렷해 뭔가 해결되는 맛이 나야 안심하는 국내 관객들의 구미에 이 영화가 제시하는 큰 사건 없는 진행과 열린 결말은 답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 작품 세계로 인정받는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히 과거 유럽 예술영화 거장들의 스타일을 답습했다면, 이 정도의 주목은 받을 리 없었다. 국내엔 아직 해외에서의 고평가와 비교하면 지명도가 낮지만, 과감한 실험적 도전을 매번 작품마다 빼놓지 않았다.
오랜 연인의 이별 파티 이벤트 준비로 전개되는 영화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흔히 '극중 극', 즉 영화 속 영화의 삽입과 유사한 구조이지만, 뭔가 조금 더 다르다. 그렇다고 오로지 형식 실험 영역에서 서사 구조를 파괴하는 것과도 사뭇 다르다. 이야기의 주제와 형식의 과감한 전복이 서로 조응하는 방법론인데, 이를 위해 주인공들의 직업부터 세밀하게 설정해 놓았기에 개연성을 지키며 이어갈 수 있다. 처음엔 마치 영사사고로 받아들일 만큼 파격적이지만, 쭉 관찰하면 어렵지 않게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험영화가 아닌, 독창적 로맨스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런 숨은 구조까지 활용하면서 영화는 실제 오랜 연인 관계를 실감 가득하게 재현한다. 여기엔 감독의 영화에서 오래 호흡을 맞춰온 배우와 긴밀한 협력도 한 몫 단단히 한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이름을 국내에 처음 알린 <어거스트 버진>부터 감독 영화에 빠지지 않던 알레 역 잇사소 아라나와 알렉스 역 비토 산즈는 그저 연기에만 그칠 게 아니라 영화의 공동 각본가로 감독과 함께 공감되는 캐릭터와 설정을 꾸미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의 개성을 품은 연애, 그것도 15년 치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관계를 구조화하려면 반드시 품어야 할 과정이란 판단에서다.
그렇게 처음엔 그저 심심하고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지만, 조금씩 씹는 맛에 배어나듯 영화는 두 주인공이 정말로 성대한 이별 파티와 함께 각자의 인생을 출발할지, 아니면 비 온 후 땅 굳어지듯 권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계로 향할지 점점 관객의 마음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조바심 나도록 만들어 간다. 아마 연인이 함께 영화를 본다면 참 많은 생각이 드는 것과 함께, 현실적으로 둘이 어떻게 될 거라 갑론을박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묘한 마성이 느껴지는 영화다.
과연 이 영화의 결말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까? 물론 좋은 영화는 결말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고민과 상상을 극장 문을 나서면서 시작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좋은 영화'의 반열에 넣어줄 만하다. 다소 낯선 진행과 약간의 교양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진솔한 인간관계 드라마와 로맨스의 가변성에 매력을 느낀다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향한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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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포스터 |
ⓒ 엠엔엠 인터내셔널 |
[작품정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The Other Way Around
2024|스페인|코미디/드라마
2025.04.23. 개봉|114분|15세 관람가
감독 호나스 트루에바
출연 잇사소 아라나, 비토 산즈, 페르난도 트루에바, 존 비야르, 안드레스 게르트루딕스
수입/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
2024 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라벨유로파시네마(유럽 최고 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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