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빠르고 강력하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 즉 총알이라도 방아쇠가 없다면 발사되지 못한 채 총구 안에 머무를 뿐이다. 현재 세계는 기술보다 국제표준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표준이 있어야만 기술은 시장을 타격하고, 산업을 관통하며, 생태계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ETRI는 36건의 국제표준을 제정하고, 누적 1215건의 국제표준특허를 확보했다. 이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치열한 디지털 주도권 경쟁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방아쇠와도 같은 결과다. 표준은 더 이상 기술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기술을 작동시키는 ‘트리거’이자 생태계를 장악하는 ‘설계 언어’인 것이다.
과거의 표준은 기술 간 호환성을 높이기 위한 약속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산업 질서를 재편하고, 플랫폼의 구조를 규정하며, 무역과 외교의 무기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ICT 분야에서는 표준 없이는 기술이 실현될 수 없다. 상호 연결되지 않는 통신, 안전과 신뢰 기준이 없는 AI, 글로벌 규약이 정립되지 않은 반도체는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 도달하지 못한다.
세계 각국은 이미 이 전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수출 통제를 시작으로 AI, 통신망, 데이터 윤리 등 다양한 분야로 표준 전선을 확장하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표준 2035’를 통해 자국 중심 생태계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은 디지털 시장 규제를 강화하며 빅테크의 표준 주도권을 견제하고 있다. 세계는 기술 개발 경쟁이 아니라, 표준을 먼저 정의하고 주도하는 국가가 산업의 룰을 만드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표준의 경제적 파급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ISO의 연구에 따르면, 표준의 누적 증가율이 1% 늘어날 때 국가 GDP는 평균 0.7~1%까지 성장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준은 생산성과 효율성, 무역 확대와 시장 신뢰라는 다층적인 효과를 창출하며, 기술 생태계 전반에 걸쳐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를 이끌어낸다. 표준은 기술을 ‘실행’하게 하고, 기술로 산업을 ‘조직’하게 하는 열쇠인 셈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단순히 기술 개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계 시장에서 ‘작동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표준이라는 방아쇠가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기술 생태계의 중심으로 도약하려면, 표준기술, 표준 기반 지식재산, 표준 리더십이 통합된 입체적 표준 전략이 필요하다. 기술 개발 단계부터 표준화 가능성을 내재화하고, 표준특허를 확보하며,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의장단과 작업반 리더 등 리더십 포지션을 적극적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다. ETRI가 매년 ‘영향력 있는 국제표준기술’을 선정해 기술성과와 산업적 파급력을 평가하는 것도 이러한 전략적 맥락에 있다.
이러한 전략은 특정 기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6G, 인공지능, 반도체, 양자컴퓨팅 등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확보해야 할 미래 핵심 기술 전반에 적용된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기술을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기술이 작동하는 생태계를 설계하는 나라’, ‘표준으로 그 생태계를 설계하고 주도하는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 기술이 총알이라면, 표준은 그 총알을 날리는 방아쇠다. 방아쇠를 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지금이 바로, 그 방아쇠를 설계할 시간이다.
이승윤 ETRI 표준연구본부장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