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국제개발처 해체 수순
연간 400억弗 백신·식량 예산
지원 중단… 수만명 생존 위기
인도적 지원 사업 세계 곳곳서 ‘스톱’
실험실 병원균 방치·전염병 검사 중단
에이즈·말라리아 등 감염병 확산 우려
세계 아동지원예산은 40억 달러 ‘싹둑’
USAID 비중 20% 넘는 최빈국들 타격
예산 1년 중단되면 GNI 3% 이상 급감
세계 결핵 퇴치 프로그램 지원도 삭감
“인구 4억1000만명 더욱 빈곤해질 듯”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대외원조 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해체하는 수순에 들어가면서 세계 각국에서 진행돼온 인도적 지원 사업이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다른 국가에 인도적 지원과 개발 지원을 위해 연간 400억달러를 제공하는 USAID 프로그램 중단으로 전염병의 예방·진단·치료 시스템이 급속히 붕괴되는 등 전 세계 곳곳에서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에볼라, 엠폭스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USAID 관계자들은 현재 아프리카 전역의 실험실에서 위험한 병원균이 방치되고, 공항 등 검문소에서 전염병 감염 검사가 중단됐으며 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검역 없이 국경을 넘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또 미 행정부의 조치로 전 세계 소아마비 신규 확진자가 매년 20만명 이상 발생하고, 에볼라와 마르부르크 등 전염병 환자 역시 매년 2만8000명 이상 추가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식량 부족 사태가 현실화할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 행정부가 국제 지원 원조를 대폭 삭감하면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성명을 내고 자금 부족으로 다음달부터 내전에 시달리는 미얀마에서 100만명 이상이 식량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국제개발처(USAID) 프로그램 폐지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워싱턴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미얀마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인 1520만명이 최소 일일 식량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약 230만명은 비상 수준의 굶주림에 직면한 상태다. WFP는 이제 5세 미만 어린이, 임신 또는 모유 수유 중인 임산부, 여성, 장애인을 포함하여 가장 취약한 사람들 가운데 3만5000명만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WFP는 식량 지원을 유지하기 위해 6000만달러(약 872억원)의 자금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수만 명의 아동 목숨 ‘위험’

17일 세계일보가 국제아동권리단체 퍼스트포커스온칠드런(FFC)을 통해 입수한 예산 자료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USAID 프로그램 폐지로 삭감되는 국제 아동지원 예산 규모는 총 40억500만달러(약 5조8300억원)에 달한다.

FFC는 이 같은 액수를 지난해 예산안과 미 국무부가 의회에 제출하는 자료 등을 통해 추산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어머니와 자녀 보건 지원 예산에 가장 많은 규모인 8억6010만달러(1조2500억원)가 삭감됐다. 또 국제 아동의 기본교육과 위생 인프라를 지원하는 예산 6억6570만달러(9700억원)가 사라졌다. 

USAID가 지원하던 기본교육 예산이 사라지면서 소득이 낮은 국가에 거주하는 수천만 명의 아동을 위한 교육 혜택이 축소됐다. USAID의 해외 기본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원받은 아동의 수는 2023년 기준 약 4400만명이라고 FFC는 설명했다. 이들 국가의 아동 4명 중 3명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간단한 글도 읽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말라리아 퇴치와 아동 영양지원 예산 지원도 중단됐다.

개발 지원금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구호 분야에서도 각각 6억6010만달러(9600억원)와 4억9660만달러(7200억원)의 예산이 삭감됐다. FFC는 에이즈 구호 예산 축소로 660만명의 아동과 보호자가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됐다고 분석했다. FFC는 그동안 USAID의 에이즈 구호 계획으로 현재까지 약 830만명의 목숨을 구했고, 해외 아동의 신체적·언어적·성적 학대를 최대 57%까지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FFC 측은 “올해부터 이 모든 게 사라졌다”고 밝혔다.

크리스 베커 FFC 부사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절약했다고 주장하는 국제 아동지원 예산은 미국 전체 예산의 0.09%에 불과하다”며 “USAID가 사실상 폐지되면서 전 세계 수만 명 아동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미 국무부는 인명구조와 인도주의 등에 대해 제한적인 지원을 허용했지만 대상과 범위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며 “지원을 재개한다 해도 실행할 직원도 예산도 남아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킴비릴라노드에서 한 여성이 USAID로부터 지원을 받은 정수 시설에서 물을 긷는 모습. 킴비리라노드=AP연합뉴스

◆빈곤 심화하는 최빈국들

트럼프 행정부의 USAID 프로그램 폐지는 국제 지원에 의존하는 최빈국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 거라는 전망도 나왔다. 세계일보가 국제개발센터(CGD)로부터 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USAID의 지원이 1년간 중단될 경우 전 세계 23개 국가의 국민총소득(GNI)은 1%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공적개발원조(ODA)에서 USAID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이상을 차지하는 최빈국 8개를 꼽았다. 이들 나라는 남수단, 소말리아, 콩고민주공화국, 라이베리아, 아프가니스탄, 수단, 우간다, 에티오피아로 USAID의 지원이 사라질 경우 이들 국가의 GNI는 3% 이상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아울러 보고서는 미국의 해외원조 축소 정책으로 이들 8개국의 인구 4억1000만명이 더욱 빈곤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글로벌 보건 위기로 이어지나

트럼프 행정부의 해외원조 사업 중단 조처로 USAID로부터 지원을 받던 국제 보건기구들의 프로그램도 어려움에 빠졌다. 미국 NBC방송에 따르면 USAID는 전 세계 결핵 퇴치 예산의 4분의 1인 연간 최대 2억5000만달러를 제공해왔지만, 이번 미 행정부의 조처에 따라 지원을 삭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미국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24개국에서 결핵 퇴치 프로그램을 운용해왔다. WHO는 “미국의 지원 삭감으로 인해 질병에 취약한 18개국,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WHO에 따르면 2023년 결핵 사망자 수는 125만명에 달했다. 같은 해 결핵 진단을 받은 환자 수는 820만명으로 이는 1995년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연간 신규 결핵 환자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위치한 국제설사성질환연구센터가 트럼프 행정부 조치에 따라 계약직 1000여명에게 계약해지 통지문을 최근 보내는 등 국제 보건 분야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연구센터는 USAID로부터 연간 예산의 20% 이상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받아 활동해왔다.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USAID의 프로그램 80% 이상과 5200건의 계약이 파기됐다고 전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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