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 84제곱미터 >
[김건의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우성(강하늘)은 퇴직금 중간정산과 원룸 보증금, 직장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한도 대출, 심지어 엄마의 마늘밭까지 팔아서 아파트를 장만한다. 이 과정이야말로 소위 '부동산 불패', '역사적으로 부동산은 우상향'이라는 한국 사회에 들끓는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다.
'영끌'이라는 단어가 이제 일상적인 단어로 바뀐 시대에서 내 집 마련은 더 이상 소박한 꿈이 아니라 사회적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처럼 여겨진다. 김태준 감독의 < 84제곱미터 >는 이런 절박함에서 출발해서 욕망의 근원, 나아가 그 욕망이 진정 우리의 것인지를 물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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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84제곱미터> 스틸 |
ⓒ 넷플릭스 |
욕망의 기준선, 84제곱미터
84제곱미터라는 숫자는 한때 '국민주택 규모'로 불렸던 공간이다. 1970년대 정부가 4인 가구의 쾌적한 거주를 위한 최소 기준으로 설정한 복지적 개념이었고 아직까지도 이 크기를 '국민평형'이라 부른다. 최소 기준에서 사회적 성취의 지표로, 보장해야 할 권리에서 마땅히 달성해야 할 목표로 의미가 전환된 것이다.
우성에게 '영끌'로 얻어낸 11억짜리 아파트 등기는 '이제 나도 성취를 이뤄낸 사회 구성원'이라는 증명서다. 이때 패티 킴의 '서울의 찬가'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장면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서울을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1969년의 노래는 영화에 사용되면서 그 의도가 다르게 들린다. 소박한 삶을 향한 찬가는 부동산 불패의 선두에 있는 서울살이를 성공했다는, 생존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11억짜리 생존을 해냈다는 말의 역설이다.
한국영화에서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인물들이 각기 다른 욕망을 품고 있다는 설정은 익숙한 방식이다. 아파트 펜트하우스 입주민 대표 은화(염혜란)에게 아파트는 자산 가치를 올릴 수 있는 투자 대상이다. 그는 GTX 개통 같은 정책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아파트 단지 전체의 '브랜드 가치'를 관리하고자 한다.
우성의 윗집 남자 진호(서현우)의 욕망은 모호하지만 후반부에 드러나는 욕망은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특유의 도덕성이 심하게 뒤틀린 결과물이다. 우성의 아랫집에 사는 부부는 전세 기간을 연장하고 싶어서 특정한 행동을 일삼는다. 이들을 한데 엮은 층간소음이라는 장치는 서로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는 지점을 가시화한다. 밤마다 쿵쿵 울리는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아파트를 둘러싼 욕망들의 불협화음처럼 들린다. 우성이 소음의 원인을 찾아 위로 올라가는 과정은 아파트를 위시한 한국사회 욕망의 위계를 탐색하는 추적극 같기도 하다.
< 84제곱미터 >가 짚어내는 사회의 현실적인 욕망과 공포는 예리하다. 우성은 스스로 층간소음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다른 주민들로부터 소음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의심 받는다. 이 역설적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처한 딜레마를 정확히 보여준다. 누구나 동시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진정한 책임자를 찾기 어려운 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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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제곱미터> 스틸 |
ⓒ 넷플릭스 |
욕망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
후반부에 소음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우성을 빌미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내 집 마련의 꿈. 정확히는 아파트를 사는 것은 진정 자신의 꿈일까, 아니면 사회가 주입한 허상에 가까운 것일까. 물론 영화는 이 질문에 성급하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우성은 부동산 불패라는 허상에 피해를 받고 있다. 아파트값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대출 이자는 조금씩 오른다. 혼자서는 이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성은 이 빚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코인투자에 손을 댄다. 코인투자 서브플롯은 욕망의 중첩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다. 우성이 소위 '작전 코인'에 참여하는 것은 내 집 마련은 해소할 수 있는 욕망이 아님을 시사한다.
코인투자 시드머니를 위해 아파트를 시세보다 저렴한 값에 판매한 것은 생존하기 위해 내린 무모한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타인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이는 개인의 욕망의 실체가 사실 끝없는 사회적 기준들의 연쇄임을 보여준다.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대사는 우성의 무모한 행동의 근거를 뒷받침한다. 의식주에서 중요한 '주'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인간의 욕망이긴 하지만, 그 공간을 둘러싼 인간의 또 다른 욕망들이 문제를 키워만 간다.
'영끌족'을 묘사한 초반부,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이 얽힌 중반부의 군상극은 예리한 현실분석 덕분이지만 이러한 미덕들은 영화가 후반부에 들어 급격히 퇴색한다.
층간소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영화는 급작스럽게 스릴러의 장르적 문법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지나치게 극적인 순간의 연속으로 앞서 구축한 현실적 긴장감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양새다. 전반부에서 세밀하게 관찰했던 욕망의 복잡한 층위들이 후반부의 극적 전개를 위해 단순화된다.
우성과 은화, 진호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선악구조로 평면화되고 층간소음이라는 현실적 갈등은 스릴러적 사건으로 치환된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영화 전반부에서 제기했던 욕망의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후반부의 장르적 해결책 앞에서 실종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영끌족의 현실로 시작해 부동산을 중심으로 묘사되는 한국사회의 욕망들을 포착하다가 음모론적인 이야기 전환으로 이야기의 일관성을 잃는다. 창작자의 예리한 시선과 의도는 급격한 이야기 전환과 몇몇 현실적이지 못한 플롯으로 설득력을 잃는다.
현실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한 < 84제곱미터 >는 그것을 스릴러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온전히 밀어붙이지 못한다. 전반부의 현실적 묘사가 가졌던 설득력은 후반부 스릴러 장르로 귀결하는 과정에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결말에 이르러 우성은 사회의 상층부로 묘사되는 인물 간의 아사리판에서 우연히 살아남아 자신의 아파트를 되찾는다. 엔딩에서 터지는 우성의 웃음은 어쩌면 영화의 의도에 걸맞는 선택이겠지만, 끝에 도달하는 과정들이 순탄치 않았음을 지켜본 관객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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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제곱미터> 스틸 |
ⓒ 넷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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