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리스크를 완전히 해소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앞에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9년 가까이 총수가 재판을 받는 동안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등 산업 대전환기에 대비하지 못해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부진한 실적을 끌어올리고 ‘넥스트 반도체’가 될 만한 신사업을 발굴하는 등 경영 현안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2017년 2월 기소 이후 102차례 법정에 출석하며 발이 묶인 사이 삼성의 ‘초격차’ 기술력을 상징하던 반도체 사업은 2위로 내려앉을 위기에 처했다. AI 반도체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리면서, 올 1분기에는 D램 점유율까지 처음으로 역전당했다. 한때는 대만 TSMC를 무섭게 쫓던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 점유율은 올 1분기 7.7%로 TSMC(67.6%)를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으로 벌어졌다. 스마트폰과 TV·생활가전 시장에서도 중국의 추격에 쫓긴다.
업계는 “2015년 이후 거세진 ‘AI 파도’에 삼성전자가 올라타지 못했다”는 뼈아픈 평가를 내놓는다. 실제로 국정농단 의혹 수사가 시작되던 2016년 말 엔비디아(575억 달러)와 TSMC(1457억 달러)를 멀찌감치 따돌리던 삼성전자의 시가총액(241조원)은 현재 440조원으로 같은 기간 72배 껑충 뛴 엔비디아(4조1790억 달러)와 8.5배 성장한 TSMC(1조2320억 달러)의 성장세에 크게 밀린다. 진대제(전 삼성전자 사장)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전 세계가 AI 격변에 주목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던 시기에 삼성은 기존에 하던 일을 잘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짚었다.
■ ‘뉴삼성’ 행보 나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 글로벌 행보 가속화
2025년 2월 이재용·손정의·샘 올트먼 3자 회동
3월 이재용·시진핑 등 중국 회동
4월 일본 출장
7월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
4·5·7월 M&A 3건
오디오·전장(마시모 오디오 사업부), 공조기기(플랙트그룹),
디지털 헬스케어(젤스)
반도체·가전·스마트폰 주요 과제
◦ 파운드리 사업, 독주하는 대만 TSMC와의 격차
◦ 인공지능(AI) 반도체 핵심 부품 고대역폭메모리(HBM) 부진
◦ 중국에 추격당하는 스마트폰·가전 등 주력 분야
내부 ‘위기’ 메시지
“‘사즉생(死卽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
〈지난 3월〉
」
삼성 안팎에서는 ‘이재용 리더십’이 조직에 새바람을 넣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이 회장은 2심 무죄 선고 뒤인 지난 3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를 주문하며 쓴소리를 했다. 동시에 직접 사업 기회를 찾아 나섰다. 항소심 무죄 판결(2월 4일) 이튿날부터 서울에서 손마사요시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와 회동했다. 지난 3월 중국 출장길에선 샤오미·BYD 등 기업을 찾아 전장(자동차 전기부품) B2B(기업 간 거래) 파트너들을 만나고, 이달엔 글로벌 재계 거물들의 비공개 사교 모임인 ‘선밸리 콘퍼런스’를 7년 만에 다시 찾았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마음이 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라 외치던 이 회장의 ‘기술경영’이 탄력을 받을지도 주목된다. 바이오 사업이 안착하긴 했지만, 아직 규모가 작은 만큼 신사업 발굴이 멈추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중단됐던 M&A를 재개한 것은 긍정적이다. 삼성전자는 4월 이후에만 오디오·냉난방 공조·헬스케어 분야 3개 기업을 인수했다.
전문가들은 정체된 삼성에 뿌리 내린 관료주의를 깨뜨리고 치열하게 일하는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삼성웨이』를 쓴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법리스크가 1등의 자만과 결합되며 조직은 점점 느려졌다”며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핵심 인재 중심의 재편, 위기의식의 전파, 빠르고 과감한 의사 결정, 그리고 도전적인 목표 설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삼성전자는 6만67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 6만6000원대를 회복한 것은 10개월 만이다.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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