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사전 - 77] 밀어서 여는 문손잡이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명사. 1. 패닉바 panic bar 2. (美) 크래시바 crash bar, 푸시바 push bar, 범프바 bump bar 3. (美·法) 패닉 하드웨어 panic hardware【예문】연기가 자욱한 화재 현장에서 벽을 더듬다 가까스로 문을 찾았다. 패닉바를 밀자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패닉바가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비극적인 죽음들 때문이었다. 자신의 거주지와 직장 비상문(방화문)에 패닉바가 있는지 살펴보자.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사진 출처=Aisco Door]
패닉바다. 밖으로 밀어서 여는 여닫이문에 가로로 길게 설치된 손잡이다. 스프링이 장착된 금속 막대(bar)를 밀면 문의 잠금이 풀리는 원리다. 잡고 돌려야 열리는 일반적인 원형·레버형 문손잡이와 달리 막대를 간단히 미는 것만으로도 문이 열린다. 화재로 인해 높은 온도로 달궈진 금속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대신 몸으로 밀어서 열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이름에 뜬금없이 ‘패닉(공포)’이 붙은 이유는 화재 등 긴급 상황에서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을지라도, 직관적으로 쉽고 빠르게 탈출할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을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만든다. 통제할 수 없는 사고(事故) 현장에서 이성적으로 사고(思考)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안에 의한 퇴행으로 잠시 인지 능력이 저하하는 공황 상태에 빠진 수백 수천 명의 군중 한복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복잡한 조작을 필요로 하는 장치는 무용지물이다. 패닉바는 여는 힘·행위와 미는 힘·행위를 일치시킴으로써 탈출을 위해 몰려드는 인파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단순히 열기 쉬운 장치가 아니라, 극단적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파악한 발명품인 셈이다.
영국의 화보신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서 삽화 형태로 그린 빅토리아 홀과 사고 현장 구조. 뭐 구조를 저렇게 만들었어 - 싶지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덥다고 방화문을 열어 놓거나, 문 앞에 상자를 쌓아두었다면 반성하자. [사진 출처=공공저작물]
1883년 6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선덜랜드의 빅토리아 홀에서 벌어진 비극은 패닉바가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마술 공연에 20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다.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고, 무료로 나눠주는 선물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어린이들이 계단 아래 출구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계단 아래쪽 출입구는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방식이었고, 한 명의 아이만 지나갈 수 있는 간격만큼만 열리도록 빗장으로 고정돼 있었다. 검표와 질서 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수백 명이 아이들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돌진했다. 열리지 않는 문과 밀려오는 인파 사이에 갇힌 아이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물러서!”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의미 없이 묻혔다. 넘어진 아이 위로 다른 아이가 넘어지고 포개졌다. “형, 누가 내 얼굴을 밟고 있어. 형, 내 손 놓으면 안 돼.” 여섯살 찰리 딕슨이 형 알피에게 남긴 마지막 말¹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어른 관객과 시설 관리인이 애를 써봤지만,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그날 3세에서 14세 사이의 아이들 183명이 압사했다. 이 중에는 신원을 알아볼 수 없어 다른 집으로 운구된 시신도 있었다.
¹ 선덜랜드 에코 인용. Children‘s deaths that shocked the world 2008.6.13
프랑스의 화보신문인 르 저널 일러스트레 1883년 7월 1일 자에 실린 빅토리아 홀 참사 삽화. 그 와중에 희생자가 186명이라고 야무지게 틀렸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문을 다 열리지 않도록 고정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기소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비극은 흔적을 남기고, 무고한 이가 흘린 피는 안전 수칙을 써 내려갈 잉크가 된다. 빅토리아 홀 참사 이후 영국 정부는 건물 안전에 대한 법적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공연장 등 다중이용시설에서는 바깥쪽으로 열리고 내부에서 열 수 있는 출입문을 최소 몇 개 이상 설치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법이 통과됐다.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은 정부만이 아니었다. 로버트 알렉산더 브릭스(1868~1963)는 1892년 패닉바의 전신인 패닉 볼트(panic bolt, 여기서 볼트는 볼트 너트가 아닌 빗장의 의미)에 대한 특허²를 출원했다. 작동 원리는 패닉바와 유사하다. 가로로 설치된 누름 막대(push rod)를 누르면 빗장이 풀려 문이 열리는 방식이다. 참사 당시 선덜랜드에 살았던 브릭스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결심하고 장치 개발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³. 1892년 특허 승인 직후 개장한 뉴 엠파이어 극장은 패닉 볼트가 설치된 최초의 극장이었다.
² 특허번호 GB18871/1891 극장 및 기타 공공건물의 출입문용 빗장 및 잠금장치의 개량(Improvement in Bolts and Fastenings for Doors of Theatres and other Public Buildings)
³ 데일리 미러에 실린 칼럼 인용. Old Codgers Little Black Book No 3’, 1977년, Mirror Books, Ltd. p. 170.
사우스시(southsea) 킹스 극장 출입구에 설치된 패닉 볼트. [사진 출처=Patricia Lovell 페트리샤 러벨]
하지만 안타깝게도 패닉바는 더 참혹한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나 영국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1903년 12월 30일 미국 시카고 이로쿼이 극장(Iroquois Theatre)에서는 뮤지컬 ‘푸른 수염’ 공연이 한창이었다. 이날 극장을 찾은 관객은 1600여 개의 객석보다 훨씬 많은 2200여 명에 달했다. 입석 표를 산 이들은 통로와 객석 뒤에 빈틈없이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와 방학을 맞아 학생과 학부모 관객이 많았다.
사고 한 달 전인 11월 23일 개관한 이로쿼이 극장은 ‘완벽한 내화耐火건물(absolutely fireproof)’이라는 문구를 광고와 전단에 썼을 만큼 화재 안전성을 강조했다. 시카고 대화재 이후 화재 예방 규제가 엄격해진 영향도 있다. 극장 측은 30개에 달하는 출입구(비상구)와 철저한 방화 시설 덕분에 관객 전원이 5분 만에 대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근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만에 불과했지만, 하여튼 그렇다.
1903년 개관 당시 이로쿼이 극장.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600명 이상이 사망한 1903년 이로쿼이 극장 화재 현장. 불타버린 좌석과 그을린 벽면이 화재 당시의 참상을 짐작게 한다. [사진 출처=시카고 트리뷴, 공공 저작물]
시작은 작은 불꽃이었다. 무대 장치 배선에서 발생한 불꽃은 이내 무대 커튼에 옮겨붙었다. 불은 무대 장치 쪽으로 번졌다. 무대 배경으로 사용하는 초대형 캔버스에는 유화로 그린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역시 화재를 키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각 층의 관객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30개의 출구 중 27개는 잠겨 있었다. 출구 표시 따위는 없었고, 상당수의 문은 가연성 커튼으로 가려 있었다. 문은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방식이었고(또 이런다 또), 생소한 도개식 잠금장치(跳開·bascule lock)가 설치돼 있어 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패닉에 빠진 관객들은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돌진하며 서로 밀치고 짓밟았다. 미완성 상태로 방치된 비상계단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화재는 30분 만에 진화됐지만, 탈출 과정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사망자만 602명에 달했다. 희생자 상당수가 비상구 안쪽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질식하거나 압사했다. 단일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 사망자 수로 따지면 미국 건국 이래 최악의 사고다.
이로쿼이 극장 화재 다음날인 1903년 12월 31일 자 시카고 트리뷴 1면.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사진 출처=시카고 트리뷴]
선덜랜드에서도 시카고에서도, 필요할 때 열리지 않는 문은 그 자체로 재앙이 됐다. 사고 이후 시카고는 물론이고 미국 주요 도시의 건물법과 소방법은 다시 쓰였다. 비상문은 안쪽이 아닌 바깥으로 열리도록 한 규정이 만들어졌고, 다중이용시설에서 패닉바를 비롯한 비상 탈출 장치가 의무화됐다. 모든 출구에는 밝고 명확한 표지와 조명이 설치되도록 강제했다. 출구 수, 통로 폭, 비상계단 위치 등 구조적 기준도 강화됐다. 극장 시설 난연재료 사용, 정기 안전 점검, 최대 수용 인원 제한, 입석 판매 금지도 이로쿼이 극장 화재 이후 생겨난 조치다.
빅토리아 홀의 비극이 패닉 볼트의 기원이 됐듯이, 패닉바를 낳은 산파는 이로쿼이 극장 화재였다. 건축자재 엔지니어인 칼 프린츨러(Carl Prinzler, 1870~1949)는 친구이자 건축가인 헨리 듀폰(Henry H. Dupont)과 함께 1908년 비상구를 쉽게 열 수 있는 패닉바, 당시 명칭 안전 비상 출구 장치(safe exit device)를 특허 출원하고 상용화했다.
프린츨러는 자신이 근무하던 보네거트 철물점(지금의 홈디포와 유사)과 계약을 맺고 폰 듀프린(Von Duprin)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이는 보네거트(VONnegut)와 듀폰(DUpont), 프린츨러(PRINzler)에서 각각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김나박이(김범수·나얼·박효신·이수)와 유사한 작명 센스라 하겠다. 지금도 폰 듀프린은 패닉바 시장에서 가장 이름값 높은 브랜드로 꼽힌다. 진짜 원조인데 당연한 대우다.
패닉바의 아버지 칼 프린츨러. 사람 살리는 기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멋져 보인다. [사진 출처=Mclauvi/Wikipedia, 공공 저작물]
국내에서도 다중이용시설에서 패닉바 설치가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설치 빈도와는 별개로 건축법·소방법상 설치 의무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가 끝이라면 좋겠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극장을 안전하게 만들었더니 이번엔 학교에서 사달이 났다. 1908년 3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린우드의 레이크뷰 초등학교에서 학생 170명을 비롯해 173명이 목숨을 잃은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 이후 학교 화재 안전 규정은 대대적으로 개선됐다.
1911년 3월 25일 뉴욕 맨해튼에서 발생한 화재는 열악한 노동 환경이 만든 인재(人災)였다⁴.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146명이 사망하고 71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산업 재해로 꼽힌다. 희생자 대부분 소외계층이자 약자들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성인 여성과 소녀(123명)이었으며, 유대인·이탈리아·러시아 출신의 이민자였다.
⁴ 미국 노동부 ‘THE TRIANGLE SHIRTWAIST FACTORY FIRE’ 인용. https://www.osha.gov/aboutosha/40-years/trianglefactoryfire
1911년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 진화 당시 사진. 화재 현장에 소방 사다리와 닿지 않아 인명 피해가 컸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의류 공장은 10층짜리 애쉬 빌딩⁵의 8, 9, 10층을 쓰고 있었다. 8층에서 불이 나자 공장주는 화재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장 먼저 옥상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분노1). 정작 직원 상당수는 대피할 기회조차 없었다. 근로자의 무단 휴식과 도난을 막는다는 이유로 근무 중엔 계단과 출구의 문을 잠갔기 때문이다(분노2). 심지어 공장 내부에는 스프링클러 등 방화 시설도 없었다(분노3). 옥상과 연결된 유일한 비상계단 마저 부실하게 시공돼 탈출 과정에서 무너졌고, 이 때문에 수십 명이 추락사했고 탈출구도 사라졌다(분노4). 결국 희생자들은 연기와 불길에 사망하거나, 빌딩 창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1급 및 2급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공장주 맥스 블랭크와 아이작 해리스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들은 이후 민사 소송에서 한 사람당 75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긴 했지만, 화재 보험금으로 더 많은 돈⁶을 챙겼다(분노5). 참사 이후에도 사업을 이어간 이 두 사람은 불과 2년 뒤인 1913년 또다시 근무 시간 중 공장 문을 잠근 혐의로 벌금 20달러를 부과받았다(분노6 도저히 못 참겠다).
⁵ 현재는 브라운 빌딩으로 불리며 뉴욕대 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⁶ 당시 지급된 보험금은 6만 달러로, 사망자 1인당 420달러를 챙긴 셈이다.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정의봉 마려운 맥스 블랭크와 아이작 해리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사진은 국제여성의류노동자연맹(ILGWU) 소장품이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Brown Brothers 촬영 추정]
열리지 않는 출입구가 패닉바의 등장을 이끌어냈듯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의 비극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에 대한 대오 각성으로 이어졌다.
뉴욕 주의회에서는 공장조사위원회(Factory Investigating Commission)를 설립해 화재, 위생 문제, 산업 재해 등으로부터 근로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 대책을 논의했다. 2년 간 주 전역에서 59차례의 공청회를 개최했고, 472명의 증언을 확보했으며, 3385개에 달하는 작업장을 조사했다⁷. 이후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현대화된 노동법과 소방법 개정안이 속속 통과됐다. 건물 출입구와 비상구를 개선하고 자동 스프링클러, 소화기, 화재경보기 등 안전 장비 및 시설을 의무화했으며, 근로자의 식사 개선 및 화장실 증설 등 노동 환경 개선과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 제한도 법으로 정했다. 노동자 재해 보상 측면에서도 고용주의 책임을 대폭 강화한 무과실 책임주의를 채택해, 이후 세계 각국이 도입한 산업재해 보상법과 사회 보장법의 토대가 되는 원칙을 확립했다. 미국안전전문가협회(ASSP, American Society of Safety Professionals)도 이 시기에 창설된 단체다.
⁷ https://history.nycourts.gov/wp-content/uploads/2023/11/Triangle_Shirtwaist_Factory_Fire_article.pdf 뉴욕법원 역사학회(The Historical Society of the New York Courts)
전국소비자연맹에서 노동 운동을 하던 프랜시스 퍼킨스(1880~1965)를 정치 활동에 뛰어들게 만든 것도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의 비극이었다. 화재 사건 이후 구성된 시 안전위원회에 합류했고, 주의회에서 관련 노동법이 통과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주 산업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거친 그녀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의 제4대 노동장관이자 미국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 큰 족적을 남긴다.
1933년 8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프랜시스 퍼킨스 장관. [사진 출처=타임]
시민과 노동자 역시 행동에 나섰다. 4월 5일 열린 장례 행렬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공공 안전에 대한 시민위원회가 구성돼 주의회 조사위 조직을 촉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화하고 노동조합의 역할을 확대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군가의 삶을 파괴한 비극은 남겨진 이들의 변화를 추동한다. 덧없이 죽어간 이들에게, 우리는 안온한 삶을 빚지고 있다.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를 다룬 1911년 만평. 달러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공장주가 문을 막고 있고, 안쪽에선 노동자들이 화염과 연기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사진 출처=코넬대학교 Kheel Center, 공공 저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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