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Focus - 중남미 ‘핑크타이드 2.0’ 위기
콜롬비아, 대선자금 유용 의혹
코스타리카, 최측근 사업 특혜
페루, 대통령 월급 ‘셀프 인상’
일부 장기집권, 권위주의 변질
참여·자유 등 ‘좌파 가치’ 퇴색
‘온건좌파’ 브라질·멕시코 순항
시장 친화적 노선 중도층 지지

2020년대 들어 중남미에서 일어난 좌파 정권의 두 번째 물결, 이른바 ‘핑크타이드 2.0’이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경제난 타개와 복지 확대를 약속하며 출범했던 진보 정권들이 잇따라 무능과 부정부패 논란에 휩싸이면서다. 향후 18개월간 주요 중남미 국가에서 대선과 총선이 예정된 가운데, 중남미 유권자들의 민심이 ‘실용성’과 ‘성과’에 집중한 우파 정권을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아메리카스 쿼털리’(Americas Quarterly)는 “마약 카르텔과 조직범죄가 만연한 중남미에서 ‘성장’과 ‘안보’를 내세운 우파 정권이 실용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지난 4월 에콰도르 대선 결선 투표에선 접전이 예상됐던 것과 달리 강력한 치안 공약을 앞세운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이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파라과이에선 친미 외교와 경제 부양을 내세운 산티아고 페냐 대통령이, 아르헨티나에선 시장주의 기반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민심의 지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좌파 정권 퇴조 부른 무능과 부패=핑크타이드 2.0의 약화된 배경으로는 무엇보다 좌파 정권들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지목된다.

콜롬비아 최초의 좌파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는 2026년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으나, 내각과의 갈등으로 핵심 장관들이 잇따라 사퇴하면서 국정 운영이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아들의 폭로로 대선 자금 유용 의혹이 불거지자 그는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고통스러운 정보를 인정한다”고 밝혀 신뢰에 타격을 입은 상태다.

코스타리카의 로드리고 차베스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형사소추 특권 박탈 위기에 놓였다. 중미경제통합은행(CABEI)의 40만5000달러(약 5억5700만 원) 규모의 홍보 사업을 자신의 최측근이 운영하는 업체 ‘RMC 라프로둑토라’에 몰아주려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로이터통신은 내년 2월 대선과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여당 사회민주진보당(PPSD)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면서 정권 교체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페루에선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도덕적 무능’을 이유로 취임 1년 반 만에 탄핵됐고, 후임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 역시 성형수술 논란과 월급 인상 등으로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따르면 임기를 1년 남겨둔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는 2%에 불과해 현 정권은 교체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위주의로 기운 좌파…퇴색된 핑크타이드의 이상=일부 좌파 정권은 권위주의로 기울면서 핑크타이드가 표방했던 참여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의 가치를 퇴색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유지되는 좌파 정권은 핑크타이드의 지속이라기보다, 그 이상이 변질된 결과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그중 베네수엘라는 중남미 좌파 정권이 장기 집권 속에 권위주의로 기운 대표적 사례다. 베네수엘라 마투린 형사법원은 지난달 SNS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린 청년 메를리스 오르페사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해 출구조사에서 야당 후보의 승리가 예측됐음에도, 친정부 성향 대법원의 판결로 3선에 성공했다. 이후 지난 5월 치러진 총선·지방선거 투표율은 10%대에 그치며 베네수엘라 국민은 선거 자체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니카라과 역시 좌파 정권이 권위주의로 기운 국가 중 하나다.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2007년 집권 이후 권력을 집중시키며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201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폭력 진압한 오르테가 대통령은 야권 인사와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체포·투옥하며 반대 세력을 사실상 와해시켰고,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를 부통령에 임명해 가족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다. 니카라과에선 2025년 대선이 예정돼 있지만, 주요 야당 후보들의 사전 구금과 출마 금지, 언론 통제 등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온건 좌파는 생존…이념보다 ‘성과’ 중시=반면 브라질과 멕시코에선 온건 좌파 정권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시장 친화적 실용 노선을 통해 중도층을 설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노동자 출신 정치인으로, 2000년대 중반 보우사 파밀리아(가족수당) 등 사회정책을 통해 빈곤층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려놓은 바 있다. 현재도 복지 기조를 유지하면서 물가 안정과 재정 균형을 강조하고 있으며, ‘성과를 내는 좌파’로서 국민의 기대를 받고 있다. 글로벌 외교 무대에서도 브릭스(BRICS) 등을 통해 브라질의 중재자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은 전임자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인기를 계승하면서도, 포퓰리즘 색채는 줄이고 행정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강조해 당선됐다. 과학자 출신인 그는 멕시코시티 시장 재임 시절 환경·교통 정책과 팬데믹 대응에서 실적을 쌓았다. 대중적 카리스마보다 데이터 기반의 행정을 중시하는 실용적 이미지가 중도 유권자에게 어필했다는 분석도 있다. 스페인 대표 싱크탱크 엘카노 왕립연구소는 “셰인바움은 사회정의와 공공정책 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는 절제된 외교로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흐름에 중남미 정치 지형이 단순한 좌우 대결이 아닌 성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남미 유권자들이 더 이상 이념이 아닌 전보다 나은 삶을 가져오는 정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지연 기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