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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빌(책세상·1996)」
핵공격 이후 종말론적 세계 그려
소설 속 마을들 무역 협상처럼
관세 협상서 명분 주고 실익 챙겨야 
14개국 관세율 4개월간 변동 적어
다국적기업들 해외 생산도 변수
협상 대상에서 빠진 ‘서비스’가 관건
온플법 추진, 콘텐츠 수출 등 초점
명분 아닌 방위비, 대체 가능할 수도

트럼프는 관세와 무관한 주한미군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고 있다. 2019년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서 연설 중인 트럼프. [사진 | 뉴시스]

미국과의 상품 관세 협상 데드라인이 8월 1일로 정해졌다. 통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직접 했다. 트럼프는 7일(현지시간)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관세율을 적시해 14개 나라에 보낸 이른바 '관세 서한'을 공개했다. 4월 2일 발표한 관세율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율은 협상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아포칼립스 소설 「말빌」을 통해서 무규칙 협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봤다.

프랑스 작가 로베르 메를르가 1972년 발표한 「말빌(책세상·1996년)」은 대표적인 아포칼립스(계시록) 소설이다. 핵전쟁 이후 파리 근교 '라 로크'와 '말빌'에 인구가 각각 20명, 9명인 두 집단이 살아남는다. 어느 날 인구 20명의 대국 라 로크 마을 대리인이자 신부인 퓔베르가 소국 말빌의 리더 엠마뉘엘을 찾아온다.

라 로크는 '아기에게 먹일 우유'라는 명분으로 소국 말빌의 암소를 요구한다. 라 로크는 말빌에서 우유를 제공하는 것도 거절하고, 아이를 대신 키워주겠다는 대안도 묵살한다. 결국 말빌은 암소 한 마리를 라 로크에 주고, 소총 3정과 암말 2마리를 받기로 한다. 정말 우유와 총이 이 무역 협상의 핵심이었을까. 아니다. 말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도시 사람이기 때문에 퓔베르에게는 농부로서의 본능이라는 게 없다. 라 로크의 암말 두 마리를 받게 되면 내가 단 한 마리뿐인 종마까지 합쳐서 이 고장의 암말 사육장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1권 371쪽)."

트럼프의 경제관은 "수입은 나쁜 것이고, 무역 적자는 더 나쁘며, 미국으로부터 무역 흑자를 보는 국가는 가장 나쁘다"로 요약된다. 예를 들어 국내총생산(GDP)은 소비, 투자, 정부지출, 수출을 더한 숫자에서 수입을 빼서 구한다. 트럼프의 이단적 경제학에서 이 수입을 0으로 만들면 GDP도 늘어난다. 관세 부과가 미국의 성장이라는 주장의 근거다.

그런데, GDP를 구하는 공식에서 수입을 빼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GDP는 국내에서 생산된 것들의 총합이다. 그런데 수입은 소비, 투자, 정부지출에 모두 포함되므로 마지막에 수입금액을 빼지 않으면, 그만큼 GDP가 과다 계산된다.

그래서 트럼프 측과의 관세 협상은 사실 무의미하다. 논리와 사실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14개 나라에 제시한 4월과 8월 관세율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게 하나의 증거다. 심지어 일본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괘씸죄로 1%포인트가 더 추가됐다.

관세율을 결정하는 공식도 명확하다. 미국은 무역적자를 대미對美 총수출 금액으로 나누고, 그 절반을 이스라엘 관세율로 정했다. 현재 미국 최우방국인 이스라엘에 관세 17%가 적용된 것만 봐도 협상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 수 있다. 협상의 근거도 없지만, 범위도 무척 좁다.

상품 수출 대기업들이 다국적기업인 것도 협상의 의미를 축소한다. 관세는 상품을 만드는 회사의 국적이 아니라, 이 회사가 실제로 생산하는 공장의 국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 대기업들은 이미 생산기지를 상당수 해외로 이전했다. 베트남, 중국, 멕시코 정부가 열심히 관세 협상을 하는 게 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이 협상하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서비스'다. 미국이 인터넷 서비스나 콘텐츠 수출 같은 '서비스'를 관세 부과 대상에서 뺀 이유는 두 가지다. 서비스는 미국이 유일하게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고 있는 부분이고, 미래 성장 엔진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증시를 이끄는 '매그니피센트7' 중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구글), 메타(페이스북)가 서비스 기업이다. 애플과 테슬라의 매출도 상당 부분 서비스 부문에서 나온다.

우리 정부는 실익이 별로 없고, 협상 범위도 좁은 '상품' 관세 대신 협상 테이블 아래에 있는 '서비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국 서비스 기업으로부터 우리 정부가 세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온라인플랫폼법이 대표적이다. 구글 지도와 같은 미국 서비스로부터 국내 기업을 지킬 수 있는 약간의 유예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음악이나 드라마 등 콘텐츠 수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관세 협상 대상은 상품이다. 미국의 서비스 무역흑자가 막대하고, 해당 기업들이 미래의 성장 엔진이기 때문이다. [사진 |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느닷없이 한국을 언급했다. "한국은 돈을 많이 번다. 스스로 군사비를 조달해야 한다. 우리가 한국을 재건했고, 우리 군대가 머물러줬다. 내가 (첫 임기에서) 전화 한통으로 3억 달러(약 4200억원)를 받아냈다. 100억 달러(약 13조원)는 내야 한다."

인구 20명 대국인 라 로크의 한 중간관리자도 말빌과의 무역 거래에서 말을 내주면서 '안장'은 내놓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금반지 하나를 얻어갔다. 트럼프가 무역흑자나 관세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 방위비 얘기를 하는 이유도 본질적으로 같다. 방위비 증액을 대신할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라 로크의 관리도 꼭 금반지를 원했던 건 아니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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