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민간기금' 만들어 경쟁시킨다
국정위 '퇴직연금 기금화' 국정과제로 채택
최소 50조 규모 기금 복수로 설립해 수익률 경쟁 체제로
대체투자도 허용…가입자가 투자성과 보고 운용사 선택
정부가 퇴직연금 제도를 복수의 대형 민간 기금이 경쟁하는 구도로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운용자산 50조원 이상인 민간 기금 여러 곳이 수익률 경쟁을 벌이면, 가입자가 투자 성과를 보고 자신의 퇴직금을 굴려줄 기금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9일 정부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정기획위원회는 ‘퇴직연금 기금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세부 실천 과제로 최소 50조원 규모의 복수 민간 기금을 출범시켜 경쟁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네덜란드(ABP), 호주(슈퍼애뉴에이션) 등 연금 선진국 모델을 벤치마킹해 국내 실정에 맞는 시스템을 설계 중이다.
정부가 퇴직연금 기금화를 추진하는 것은 기존 퇴직연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 수준에 그쳐 노후 보장 시스템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퇴직연금은 가입자나 사업자가 스스로 상품을 선택해야 해 투자금 대부분이 ‘원금보장형’에 몰려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은 2.93% 수준이다. 이에 전문기관이 펀드 형태로 모아서 운용하는 ‘집합적 확정기여(CDC)형’으로 진화시켜 수익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투자 가능 자산에 벤처, 부동산, 인프라, 비상장주식, 사모펀드(PEF) 등 다양한 대체투자 자산군을 포함하는 방안도 함께 추진한다. 고용부는 최근 업무보고에서 기금형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 방침을 밝혔는데, 국정기획위는 더 다양한 대체투자 자산에 투자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국정기획위 핵심 관계자는 “이번 개편의 핵심은 두 개 이상 독립 기금이 수익률을 두고 경쟁하고 가입자가 이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입자가 기존 퇴직연금을 기금으로 옮길지는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이 관계자는 기금형 수익률이 높으면 기존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간기금 경쟁 체제 도입…중위험·중수익 상품 다변화
공단 설립 대신 민간기금 체제로…주식·채권·대체투자 등도 허용
정부가 퇴직연금 도입 20년 만에 연금 운용 방식을 기금형으로 바꾸는 대수술에 나선 것은 20년째 은행 예금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저조한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개인에게 투자운용을 맡기다 보니 적립금의 87.2%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몰려 퇴직연금의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2.93%에 그쳤다. 정부는 전문 운용기관이 주식·채권은 물론 대체투자까지 포함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기금을 운용하면 국민연금처럼 연평균 7% 수준의 수익률 달성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공단 대신 민간 중심 ‘복수 기금’ 체제로
개편안의 핵심은 50조원 이상 퇴직연금 기금을 여럿 설립해 수익률 경쟁을 유도하는 구조에 있다. 기금화 논의 초기에는 국민연금처럼 별도 공단을 설립하거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위탁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현재는 민간 금융회사가 직접 참여하는 복수 기금 체제가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국정기획위원회 내에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단 설립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지난 20년간 퇴직연금 사업을 영위한 금융회사의 사업 기반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간 주도 복수 기금 체계가 실용적인 대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가입자 편의를 높이는 동시에 업계 반발을 고려한 절충안”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주요 퇴직연금 사업자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해 기금을 조성하고 수익률로 경쟁하는 구조를 구상 중이다. 운용자산이 50조원 이상은 돼야 주식 채권 등 전통자산뿐 아니라 대체투자 자산 등에도 안정적으로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저위험·저수익과 고위험·고수익만 존재하며 중위험·중수익 상품은 사실상 실종됐다”며 “벤처, 인프라, 부동산 등 다양한 대체투자를 통해 상품 구성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투업계 “DC형은 민간 자율에 맡겨야”
금융투자업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국내 퇴직연금의 본질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것이란 시각이다.
국정기획위가 추진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모델은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 적용되는데, 이는 국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 431조7000억원의 27.4%(118조4000억원)에 불과하다. 49.7%(214조6000억원)를 차지하는 확정급여(DB)형을 그대로 둔 채 제도를 바꿔봐야 ‘쥐꼬리 수익률’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기금형 퇴직연금 모델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호주는 DC형 비율이 95% 이상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4.77%였는데 운용 방법별로는 원리금보장형이 3.67%, 실적배당형은 9.96%였다. 대부분 원리금 보장형으로 운용되는 DB형이 전체 수익률을 끌어내린 셈이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한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서비스나 가입자의 생애주기에 맞춰 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타깃데이트펀드(TDF) 등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수익률도 개선되고 있다”며 “DB형을 그대로 둔 채 민간 자율에 맡길 수 있는 DC형을 손대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2년에 도입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을 먼저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설정된 운용 방식으로 자동으로 운용하는 제도다. 하지만 디폴트옵션 상품에 은행 예금 등 원리금 보장 상품이 포함돼 있어 가입자의 적극적인 운용을 막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적극 투자형’ 상품을 선택하더라도 위험자산 투자 한도가 70%로 막혀 있는 점도 문제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회사 컨소시엄으로 기금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래에셋증권 연금 관련 고위 임원은 “각 금융사는 지향하는 투자철학이 다르고 관리 시스템도 차이가 크다”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은/정영효/곽용희/최만수/배성수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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