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7일 미국 워싱턴 상무부 청사에서 하워드 러트닉 장관을 만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협상 상대들의 양보를 유도하려고 경고해온 ‘관세 서한’을 한국이 받자 정부는 잇따라 대책회의를 여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다. 정부는 상호관세 발효 재유예로 시간을 벌었다는 입장이지만 트럼프가 한국과 일본에 초점을 맞추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에 긴장하며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트럼프는 8일 새벽 1시20분께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관세 서한’을 공개했다. 여러 나라에 서한을 보내겠다고 미리 경고하기는 했으나 동맹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상대의 새벽 시간대에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외교적 결례다.
대통령실은 이날 김용범 정책실장 주재로 관계 부처 대책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다. 김 실장은 “조속한 협의도 중요하지만 국익을 관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문신학 1차관 주재로 ‘민관 합동 긴급 점검회의’를 열었다.
정부 안팎에서는 상호관세(한국은 25%)가 4월9일에 잠깐 발효됐다가 90일간 유예된 데 이어 8월1일까지 재유예된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분위기다. 최대 대미 수출품인 자동차는 25% 품목 관세 등의 영향으로 미국으로의 수출이 상반기에 16.8% 줄었다. 역시 미국이 50% 품목 관세를 매긴 철강은 상반기 전체 수출액이 5.9% 감소했다. 여기에 한국 상품 전반에 적용되는 상호관세까지 매겨지면 국내총생산(GDP)도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애초 상호관세 유예 시한으로 선언한 7월9일을 앞두고 위성락 대통령실 안보실장과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동시 방미한 것을 두고, 돌파구 마련이 기대되기도 했다. 큰 틀에서 합의하거나 단계적 협상 추진에 합의해 관세 압박을 더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었다. 앞서 영국과 베트남이 미국과 대략적인 틀에 합의하면서 협상을 일단락 지은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결국 한국이 ‘관세 서한’의 수신자가 되면서 앞으로 3주간 큰 양보를 원하는 미국과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한다. 정부로서는 90일이었던 첫번째 유예 기간보다 짧은 3주 안에 국익과 트럼프의 요구 사항을 절충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든 것이다. 산업부는 협상을 “미국의 주된 관심사인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국내 제도 개선, 규제 합리화 등과 함께 양국 간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을 통해 핵심 산업 도약의 계기로 활용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은 그동안 협상에서 농축산물·자동차·디지털 분야 규제 등 비관세 장벽 해소와 미국 상품 구매 확대 등을 요구했다. 트럼프가 직접 한국의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 사업 참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 쪽에서는 대선 전후로 트럼프에게 거액을 후원한 구글·아마존·메타 등 거대 플랫폼 업체들의 민원으로 한국의 플랫폼 규제 입법 움직임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강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한국 쪽에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미국 쪽은 최근에는 광범위한 요구 사항들을 전보다는 압축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미국에 디지털 분야 등 비관세 장벽 개선, 에너지 등 구매 확대, 조선·인공지능·반도체·에너지·바이오 등 산업 협력을 카드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의 주목적 중 하나가 미국 제조업 부흥인데, 정부는 한국이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는 쌀과 쇠고기 시장 개방 확대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 본부장은 7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을 면담한 데 이어 9일에도 그를 만나 집중적인 교섭을 벌인다.
하지만 트럼프가 ‘관세 서한’을 보낸 것은 그간 보냈던 한국 쪽 제안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트럼프가 ‘8월1일이라는 시한이 확고하냐’는 기자들 질문에 “100% 확고하지는 않다”며 상대의 제안에 따라 “열린 자세”를 갖겠다고 밝힌 것도 협상 전략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가 한·일에 집중하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해 “한·일은 대미 무역흑자가 많고, 자동차 등 품목 관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또 미국에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면서도 안보는 의존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협상 전략에 관해선 “농축산물은 양보가 쉽지 않으니까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품목을 중심으로 개방을 확대할 수 있다”며 “디지털 분야 등에서 좀 더 양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이본영 고경주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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