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강명 작가, 신간 ‘먼저 온 미래’ 통해 ‘AI 이후 세계’ 조명
프로기사·전문가 36명 인터뷰
AI를 먼저 경험한 바둑계 살펴
“공부 방법·관전 문화 싹 달라져”
“창의성, 궁극 가치 추앙받지만
언제든 다른 가치로 대체 가능
기술이 가치 훼손하는 건 악몽
인간이 통제하고 미래 바꿔야”
인공지능(AI)이 삶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탐구해온 작가 장강명이 신간 ‘먼저 온 미래’를 펴냈다. 바둑계 관계자 36명을 인터뷰해 AI 도입 후 바둑계가 달라진 모습을 조명하면서 다른 문화예술 분야의 미래도 읽어낸다. 작가 제공
“중학생 때 TV에서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걸 본 적이 있는데, 지난 2016년 알파고-이세돌 대국을 보고 그것과 비슷한 충격파를 받았습니다.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졌는데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파고들어 책을 쓰기 시작했죠.”
바둑계는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맞선 지난 2016년 3월 10일 대국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1승 4패로 지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이 덮친 것은 물론, 구성원들이 공고히 지켜온 ‘믿음’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탁월성을 뽐내는 AI 앞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믿음, 나의 기술적·지적 능력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거나 새로운 길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과거 기사들의 기보, 인간만의 영역이라던 예술성 등 모든 것이 알파고의 압도적인 승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작가 장강명은 최근 신간 ‘먼저 온 미래’(동아시아)를 펴낸 후 문화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둑계가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졌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책을 쓰면서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난 그는 “바둑을 공부하는 방법, 바둑을 관전하는 문화, 바둑을 통해 추구하던 가치가 모두 달라졌다는 것이 공통된 얘기였다”고 말했다.
AI 시대 도래 이후, 명장들의 기보를 손수 구해 공부했던 프로기사들은 실시간으로 승률을 뽑아내는 AI의 추천 수와 형세판단 데이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AI 바둑 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고수들 간의 공동연구는 사라졌고, 신진서 9단 같은 ‘젊은 초일류 기사’들도 인간보다 AI를 스승 삼아 실력을 높여갔다. 목진석 9단은 “제 느낌에 80∼90%의 기사가 AI 포석을 그대로 둔다. 처음 30∼40수 정도는 암기한 포석을 서로 따닥따닥 둔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기로에 놓인 바둑은 예술보다는 점차 ‘스포츠화’되기를 택했다. 이하진 4단은 바둑이 스포츠라는 인식이 확산된 데 대해 “예전엔 답이 없는 걸 연구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AI에 의해) 답이 나온 걸 누가 더 잘하느냐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강명은 무엇보다 “기사들이 목표로 삼는 게 바뀌었다는 김만수 8단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중국의 천재 기사 커제 9단의 경우에는 여전히 정상급이지만, 최근에는 웨이보에서 540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인플루언서로서 행보가 더 눈에 띈다. 탁월성에서 AI에 압도된 인간이 스토리와 스타성을 만드는 데 더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김만수 8단은 “커제는 신호탄을 쏘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AI가 인간이 지켜온 가치들을 침해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며 산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위기는 따로 있다. AI에 의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바둑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모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장강명은 “문학에서도 AI가 만들어내는 작품이 인간의 것보다 더 탁월하거나 더 많은 대중의 선택을 받고 그러한 작품이 하루에 수백 편씩 만들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수치로 환산되는 세계에서 AI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압도적인 우위에 놓이면 문학은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문화예술 분야에서 그토록 추앙돼왔던 창의성이라는 가치도 매일 새로운 작품을 쏟아내는 AI에 의해 퇴색될 수 있다. 장강명은 “사실 창의성이라는 것 자체가 궁극의 가치로 추앙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언제든 다른 가치로 대체될 수 있다”고도 말했다. AI의 등장으로 소외된 예술가들이 ‘훌륭한 예술’의 의미를 지금과 다르게 재정의하면서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려 할 수도 있다.
장강명에 따르면 미래에는 “우리가 알던 개념을 AI가 재정의하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배우도록 강요당하며, AI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를 그저 따라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장강명은 이 때문에 “질문이자, 경고이자, 제안”으로 책을 썼다고 했다. 그는 “가치가 기술을 이끌지 못하고 기술이 가치를 훼손하는 미래”를 ‘악몽’으로 규정하고 “기술을 둘러싼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술을 둘러싼 가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대응처럼 ‘글로벌 공적 관리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장강명은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등이 기술발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정부 보조금 등 시장 인센티브의 재조정, 거대 테크 기업의 분할, 조세개혁 등”을 제안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인간적 가치에 기반한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미래를 바꾸는 것. 그것이 현재 시점에서 AI가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장강명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다.
인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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