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게 웃고 있는 김유진
-프로 데뷔 2년 만에 첫 ITF 대회 결승
-어린 시절 언니와 사별한 아픔 극복
-수 년 동안 함께한 후원자와 가족 같은 동행
국내 여자 주니어 1위 출신 김유진(20, 충남도청)이 혹독한 프로 무대 속에서 성장통을 딛고 도약 중이다.
지난 22일 김유진은 일본에서 열린 ITF 삿포로(W15) 대회에서 프로 데뷔 2년 차에 드디어 첫 결승에 올랐다. 첫 경기부터 결승까지 세트올 경기를 펼쳤던 김유진은 결승에서 아쉬운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 했지만 투어 선수로 성장하기 위한 허들 하나를 뛰어 넘었다.
‘주니어와 프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는 말이 있다. 주니어 선수로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도 프로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계의 많은 주니어 선수들이 그렇듯 김유진도 첫 프로 대회 결승에 오르기까지 많은 부침을 겪었다.
초등부를 1위로 졸업한 김유진은 주니어 시절 14세 이하 국가대표를 거쳐 고등학교 3학년 동안 미국의 IMG아카데미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 ITF 주니어 단식 1개, 복식 2개 타이틀을 획득했고 주니어 마지막 두 해에 국내 최고 권위의 주니어 대회인 장호배를 2연패하며 국내 주니어 랭킹 1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김유진은 작년 프로 무대에 호기롭게 뛰어 들었지만 대부분의 대회에서 1, 2회전 초반 탈락하면서 주니어 시절과 다른 높은 벽을 느껴야 했다. 몇몇 대회에서 8강, 4강에 올랐지만 결승 무대를 밟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야스오 코치와 특별 훈련을 마친 뒤(왼쪽부터 이정한 드렌치 본부장, 야스오 코치, 김유진, 정휘진 코치, 원경섭 대표, 김유진 아버지)
26일 강서구 서남물재생센터 테니스장에서 만난 김유진의 표정은 밝았다. 김유진은 귀국 후 곧바로 이어질 중국 대회 출전을 대비해 일본의 프로 투어 코치 니시오카 야스오와 특별 훈련 세션을 진행 중이었다.
일본의 ATP 프로 투어 선수 니시오카 요시히토의 형인 야스오는 아시아 테니스 발전을 꿈꾸며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선수들의 코칭을 맡아 오고 있으며 2023년에는 국내 랭킹 1위 박소현(강원도청)의 코치로 커리어하이 달성에 큰 기여를 했다.
야스오 코치와 훈련을 마친 김유진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앞으로 목표에 대해 들려주었다. 김유진은 “(프로 데뷔)초반에는 지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계속 지는 게 힘들고 하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번 결승을 계기로 계속 도전하고 부딪히면 결국에는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주니어 시절과 전혀 다른 결과에 주눅 들고 힘들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김유진은 과거에 프로 무대의 혹독함 보다 큰 시련을 극복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김유진은 당시 세 살 위의 언니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사실 (테니스를)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부모님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 어렸지만 언니 몫까지 내가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니스 대회와 훈련으로 바빠서 언니와 많은 추억을 쌓지는 못했지만 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꿈에도 가끔 나온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아졌지만 항상 그립다.”
김유진은 이제 언니 몫까지 다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내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파주의 납골당을 찾아 언니 앞에서 모든 걸 털어놓으며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극복해내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단단한 선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훈련 중간 김유진과 소통하는 원경섭 대표
김유진의 옆에는 물심양면 지원하는 후원자도 함께하고 있다. 김유진은 이번 삿포로 대회에서 테니스 전문 에이전시 ‘드렌치(DRENCH)’와 공식 파트너십을 발표했는데 드렌치의 원경섭 대표가 김유진의 오래된 후원자다.
테니스 동호인이자 요식업 사업가인 원경섭 대표는 개인 후원을 넘어서 ‘단 한 명을 위해, 모든 것을 설계한다’는 철학 아래 에이전시를 차려 김유진의 성장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원 대표는 김유진이 중학교 3학년 시절 경기 하는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후원사를 찾지 못하는 김유진을 위해 개인 후원을 시작했고 IMG아카데미 3년 유학 시절 동안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의사 친구를 통해 논문을 찾아 운동 선수에게 필요한 식단 관리 매뉴얼까지 짜서 제공할 정도로 진심을 다했다.
원 대표는 “이렇게 잘하는 선수에게 후원이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선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오랫동안 후원하면서 유진이의 부모가 된 기분을 느꼈다. 장호배에서 처음 우승할 때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후원 속에 김유진은 원 대표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가족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김유진은 “항상 감사하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항상 많은 지원과 후원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그만큼 더욱 열심히 훈련하고 집중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번 준우승으로 세계 800위권에 진입하는 김유진은 올해 랭킹을 500~600위권까지 끌어올리고 프로대회 단식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목표한 바를 이루는 과정에 성장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랜드슬램에서 볼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는 김유진. 프로 선수로서 각오가 다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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