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정부가 세금을 투입해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에 한국 연구자가 참여하도록 지원합니다. 연구자들이 호라이즌 유럽 과제를 많이 수주해야 세금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정부가 호라이즌 유럽 과제 신청 필수 요건인 성평등 계획(GEP)을 위한 플랜을 적극 마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이진환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책기획본부장)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이 26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개최한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 국회 정책 대토론회-Excellence+: 과학기술분야 기관의 연구문화 혁신 방안’에서 이같은 지적이 나왔다. 토론회는 황정아 국회의원과 최수진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WISET,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공동 주관했다.
이날 최은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출연연 담당관협의회 회장), 권지혜 WISET 정책연구센터장, 김태수 NST 인재정책부장이 각각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 제도의 발전 방향’, ‘과학기술계 성평등 확산방안’, ‘출연연 여성과학기술인 현황·지속성장 지원방안’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어지는 패널토론에는 이제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문화과장, 김나영 서울대 의과대 교수, 이진환 NST 본부장, 문진석 한국한의학연구원 구전략부장, 최유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평등 연구본부장이 참석했다.
한국은 올해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 간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한다. 과학자들이 유럽연합(EU)가 지원하는 호라이즌 유럽 연구비를 따려면 사업신청서를 낼 때 '성평등 계획(GEP)'과 '성별 특성 고려 요건'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성평등계획이란 연구개발(R&D)을 진행하는 팀이 속한 조직(대학, 기관 등)이 성평등 촉진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황과 계획이다. 성별 특성 고려 요건은 연구를 진행할 때 성별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문제는 호라이즌 유럽은 한국 연구자들에게 분명 좋은 기회지만 성평등 계획, 성별 특성 고려처럼 젠더 요건이 한국 연구자에게 굉장히 낯선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 본부장은 연구자가 호라이즌 유럽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주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연구자가 구기관별 특성과 현황을 반영해 사업신청서에 잘 설명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본부장은 "현재 과학기술계로 들어오는 사람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과학자들을 성평등 제도의 부재나 육아 등으로 잃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다"며 "출연연 등 연구기관이 지켜야 하는 성평등 지표를 마련토록 하고 지표가 요구하는 기준을 지킨 기관을 인증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호라이즌 유럽을 계기로 연구기관의 성평등 인식을 고취시킬 방안을 제안했다.
이어 이 본부장은 "출연연 평가 제도가 혁신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성평등 지표를 출연연 평가의 한 항목으로 넣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며 "여성 기관장도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문 연구원도 "기관평가 지표에 여성과학기술인 채용목표제를 도입하면서 여성과학기술인 비율이 높아진 것처럼 기관 차원의 성평등 계획과 관련한 조직 설치 여부나 지표 모니터링 등을 기관평가에 도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평등 계획에 대해 남녀의 인식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 교수는 "서울대 교원 502명을 대상으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을 위한 활동이 필요한지 설문을 진행한 결과 '지금 필요하지 않다'고 응답한 남성이 21.1%, 여성이 6.2%였다"며 "남성 중 33.1%가 역차별 방지를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남성 위주의 연구환경 생태계에서 지내온 남성 과학자가 성평등 계획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호라이즌 유럽을 계기로 성평등 계획이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성평등 계획의 개념과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서울대에서부터 선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6일 권지혜 WISET 정책연구센터장. WISET 제공
권 센터장은 “성평등계획은 기관이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으면서도 연구문화에 가장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실질적인 도구다”라며 “국내에 성평등계획을 확산하기 위해 정부와 과학기술계 구성원들이 실천해야 할 과제를 제안하고 연구현장에서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 제도가 도입된지 20년을 맞이해 열린 뜻깊은 자리이기도 하다.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은 기관에서 성과학기술인의 참여 확대와 역량 강화를 전담하는 실무자다. 정부는 2005년부터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기관 등 여성과학기술인이 많이 재직하고 있는 공공기관에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제를 도입했다.
최 연구원은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 운영 기관 수는 2005년 30개에서 2023년 147개로 늘며 기관에서 역할이 커지고 있다"며 "하지만 여성과학기술인 담당관은 별도의 수당이나 규정이 없어 봉사직이라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관이 담당관 업무를 공식적인 업무로 인정해줘야 제도가 활성화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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