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
10년간 ‘흑린’ 한 가지 물질 연구
양자거리 측정 등 실험으로 입증
“이공계 인력 처우 개선도 시급”
“한국이 놓치는 것 중 하나가 미래 핵심 키워드에 대한 대비입니다. 최근 인공지능(AI)과 양자 같은 키워드가 떠오를 때 한국이 보여준 모습을 한번 보세요. 다급하게 해당 분야 전문가를 찾고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기초과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18일 연세대에서 만난 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사진)는 “5년 뒤 어떤 분야가 주목받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평범한 기초과학 분야 중 하나일 수 있다”며 “제가 만약 흑린을 놓고 다른 연구로 갈아탔다면 유행만 좇는 평범한 과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행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초과학 역량을 꾸준히 육성해야 미래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액체 금속의 전자 구조, 전자 결정, 양자거리 측정 등 그동안 이론 예측에 그쳤던 물리 현상을 실험으로 잇따라 입증하며 주목받고 있다. 연구 성과는 2021년과 2024년에 국제학술지 ‘네이처’, 올해 6월 ‘사이언스’에 공개됐다.
그는 우수한 성과를 낸 비결로 ‘한 우물 파기’를 내세웠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연구를 시작한 이래 10년째 흑린만 연구하고 있다”며 “그동안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이제 꽃을 피우는 단계인 것 같다”고 말했다.
흑린은 인(P)이 육각형으로 배열된 2차원 물질이다. 탄소(C)가 육각형으로 배열된 대표적인 2차원 물질 그래핀과 비슷하다. 흑린은 단일 원소로 이뤄지고 구조가 단순해 물리 현상을 관찰하기 용이하다.
김 교수는 “박사후연구원 시절 그래핀이 주목받자 비슷한 물질인 흑린을 연구 주제로 잡은 것”이라며 “처음엔 학생 한 명의 학위 주제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이후 흑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물리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차분하게 풀어가다 보니 10년째 한 가지 물질만 연구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기초과학과 공학, 응용과학을 분리해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안에 역량을 집중 투자하는 전략도 필요하지만 한국이 기초과학 선진국이 되려면 연구자들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산투자’를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운이 좋아서 잘 풀린 것”이라며 “중간에 연구비 지원이 끊겨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후배 과학자들도 자신처럼 잘 풀릴 것이란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모습을 축구에 비유했다. 선수가 나아갈 방향을 보고 예측해서 공을 전달하는 ‘공간 패스’를 하지 못하고 눈앞의 공만 쫓아가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초과학에서 유행이 너무 강조되면 과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바꿔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국내 이공계 인력 부족 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전국 전체 1등부터 의대 정원 수까지 성적순으로 의대에 가는 현실에서는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도 의미가 없다”고 꼬집었다. 결국 과학자 처우 개선을 최우선 해결 과제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과학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봤을 때 해외에서 연구를 이어가는 게 연구 환경, 경제적 대우, 사회적 위상 측면에서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국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앞으로 5∼10년 더 흑린을 계속 연구하며 현대물리학의 난제이자 첨단 기술의 돌파구인 고온초전도체의 특성을 밝히고 미개척 물리학 영역인 양자기하 연구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이병구 동아사이언스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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