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년 80만] 번아웃 청년
쉬었음 청년 7명 속 얘기 들어보니…
부모 세대, 낮은 이동성에 첫 직장 신중
눈 낮춰 입사해도 열악한 환경에 '사표'
좁아진 재취업 문에 경력단절 이어져
무업 기간 장기화 시 고립·은둔화 위험 상>
서울, 인천, 세종 등 각지에서 올해 3~6월 본보 인터뷰에 응한 '쉬었음' 청년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다은(가명), 영석, 채영(가명), 준열, 하림(가명), 소연(가명)씨. 도현(가명)씨는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음. 인천·세종=이유지 기자
평일 오전 7시, 남들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 한영석(30)씨는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퇴근길에 올랐다. 비수도권 4년제 대학 물류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살려 2022년 어렵게 대기업 계열사 상반기 공채에 합격했다. 기쁨은 잠시, 배치된 부서는 배송 경쟁의 최전선에 있는 곳이었다. 한 달 20~22일 근무일 중 14~15일에 달하는 야간근무는 실시간 몸을 갉아먹었고, 밤낮 없는 새벽배송 체계에 녹아들자 자괴감이 느껴졌다.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일까."
결국, 그는 2023년 9월 1년 7개월 다닌 회사를 나왔다. 처음 몇 개월간은 '잠깐 쉬면서 새 출발을 준비하자'는 마음으로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재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력서를 80장 넘게 썼지만 돌아오는 건 탈락 통보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공고를 내고도 "적격자가 없어 뽑지 않았다"는 허탈한 답변을 하는 중견기업도 더러 있었다. 무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구직활동을 이어갈 자신은 사라졌다.
그렇게, 영석씨는 탈진했다.
연령대별 쉬었음 인구 비중 추이. 한국은행 '청년층 쉬었음 인구 증가 배경과 평가' 발췌
영석씨와 같은 청년들은 통계상 특별한 이유 없이 일이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쉬는 '쉬었음' 인구로 집계된다. 15~39세 쉬었음 청년은 지난달 기준 68만4,000명. 올해 2월엔 사상 처음 8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특히 해당 연령대 쉬었음 청년 중 취업 경험이 있는 이들이 10명 중 8명 이상이다. 왜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않게 된 것일까. 본보는 30대 이하 '쉬었음' 청년 7명을 만나 심층 면담을 진행했다.
쉬었음 기간 1년 10개월째인 소연(가명)씨가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동그라미재단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유지 기자
"어디에 취업해도 그때 겪은 경험을 다시 해야 될 것이란 압박감이 컸어요."
첫 회사를 떠올리는 소연(가명·32)씨 얼굴엔 일순 그늘이 졌다. 소연씨 역시 직장을 스스로 그만뒀지만 '재취업 번아웃'에 2년 남짓 쉬고 있다. 국립대에서 영상을 배운 그는 직원 15명 규모 홍보 분야 스타트업에서 '바이럴 마케팅'으로 사회 첫발을 뗐다. 공휴일, 연휴 관계없이 팀원 3명이 영상을 일주일에 20개씩 생산해야 했다.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의 뒷모습, 동종업계에 먼저 취업해 밤낮없이 일하던 친구의 암 투병 소식은 그를 회의감으로 밀어넣었다.
때마침 온 이직 제안에 퇴사했지만, 일이 틀어지면서 무직 상태에 놓였다. 이전 업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던 그는 다른 일을 찾기로 했지만 취업시장은 냉담했다. 소연씨는 "실패가 누적되니 구직이 두려워졌다"고 털어놨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소연씨는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가끔 아르바이트(알바)를 한다. 그는 "주변 쉬었음 청년이 '마이너스 통장'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쉬었음 기간 6개월째인 이준열씨가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동그라미재단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유지 기자
6개월째 쉬고 있는 이준열(31)씨는 고교 재학 중 대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부모님이 누나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내린 결단이었다.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던 그는 "면접 본 날, 오늘부터 당장 일할 수 있다고 말했더니 바로 당일 밤 11시까지 야근을 했다"고 회상했다. 밥 먹듯 야근을 하다 결국 퇴사했고, 다른 곳에서도 일해봤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그동안은 월 190만 원 상당 실업급여로 버텼지만, 준열씨에게 의지하는 칠순 부모님을 부양하기엔 빠듯하다.
실업자와 쉬었음 상태를 9년여 오간 채영(가명)씨가 올해 3월 24일 인천 서구 한 카페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인천=이유지 기자
채영(가명·39)씨는 자신이 쉬었음 청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명문대를 나와 대형 회계법인 자회사에서 5년여 일하며 '최연소 여자 과장'까지 올랐던 그다. 겉은 화려했지만 위계적인 상사와의 마찰에 속이 곪았고, 신경성 위염으로 발전했다. 끝내 회사를 그만두자 그토록 바라던 아이도 생겼지만 그는 '경력단절여성'이 됐다. 남편 소득으로 부족할 땐 가끔 알바를 한다. 그는 "경단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회에서 밀려나는 걸 체감했지만 눈을 낮추긴 싫었다"고 토로했다.
전직이 있는 쉬었음 청년들은 공통적으로 '탈진한 경험'을 토로했다. 자신의 결정으로 일을 그만둔 자발적 쉬었음 형태지만 그 배경엔 과중한 업무와 긴 노동시간, 구시대적 직장문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가 있다. 평생직장에 대한 인식은 약해졌지만, 경직된 노동시장에 재취업은 쉽지 않다. 좁아진 취업문 앞에서 경력이 끊기고, 무업 기간이 길어지면 입사에 불리해져 비자발적 쉬었음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눈을 낮추면 되지 않느냐'는 일각의 빈축에 청년은 억울한 면이 있다. 도현(가명·34)씨는 첫 일자리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립대 이공계를 졸업한 그는 예체능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을 꺾지 못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는 "아무 일이나 하면 안 된다"였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임금 차는 익히 알던 터. 상향이동이 쉽지 않은 한국 현실에 첫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부모님 말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번듯한 직장을 구할 때까지 지원을 약속했지만 구직기간은 길어졌다. 도현씨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보여 주기 식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점점 뒤처지니 숨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눈 낮춰 취업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게 해도 가정을 꾸리고 집을 마련해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며 "어느 순간 '알바만 해도 혼자 살기엔 지장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전했다.
쉬었음 기간 1년 3개월째인 하림(가명)씨가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유지 기자
청년 인식 변화엔 내외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1년 3개월째 쉬고 있는 하림(가명·32)씨는 지난해 근무하던 스타트업 회사를 그만뒀다. 앞서 '한국판 뉴딜 일자리 사업'에 두 차례 참여하며 구직 의욕을 보였던 그는 연계 취업에 성공했지만 1년 8개월 만에 그만뒀다. 하림씨는 "정부 보조금으로 단기 인력을 충당하려 고용 사업에 참여하는 곳이 양질의 회사이긴 어렵다"며 "누가 언제든 투입돼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자신 있게 일 경험을 했다고 하기도 머쓱하다"고 말했다.
하림씨는 생활비가 부족하면 인형 눈 붙이기 등 단순노동으로 충당한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정서적 소진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만성 식도염을 앓던 때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활동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지금이 삶의 질이 훨씬 높다"고 했다. 이어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라고 하지 않나, 내가 애써도 미래에 더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기 어렵다"며 "일인분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면 다양한 삶의 모습이 존중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쉬었음이 직업이나 삶의 방향을 탐색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청년을 고립·은둔에 빠지게 할 위험이 높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다은(가명·36)씨는 지난해까지 9년간 고립청년이었다. 앞서 치과 조무사로 사내 괴롭힘을 견디며 6년간 일했지만, 집안일로 열흘 휴가를 쓰겠다는 요청마저 가로막는 원장과 갈등을 빚다 퇴사했다. 경력이 있음에도 해당 지역 병원 60여 곳에서 퇴짜를 맞았고, 문득 원장이 "협회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라고 윽박지른 것이 생각났다.
사람에 상처받은 다은씨는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주로 게임을 하고 침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반복됐고,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였다"고 돌이켜 말했다. 부모님은 다은씨가 잘못될까 쉽게 방문을 열 수 없었다. 스스로를 '캥거루족'이라고 칭한 그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함께 사니 내가 좀 덜 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청년층 쉬었음 인구 증가는 고령층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9년간 고립청년으로 생활하다 지난해부터 일을 시작한 다은(가명)씨가 올해 3월 24일 인천 서구 한 카페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인천=이유지 기자
변곡점은 사람이었다. 지난해 10년 넘게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한 지역 청년단체 행사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고,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 거절했지만 '공짜 여행'이라는 말에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리고 행사에서 다은씨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청년활동가는 협업을 제안했다. 취미였던 그림을 살려 공공기관 홍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점차 수요가 늘어 지금은 웹툰작가로 개인사업자를 내고 청년지원기관 일을 돕고 있다.
쉬었음 청년은 저마다 고립의 시간을 겪게 된다. 2023년 보건복지부는 전국 19~39세 청년 중 최대 54만 명이 고립·은둔 상태에 있을 것으로 추산했지만 정확한 실태 파악은 어렵다. 준열씨도 "어느 순간 검색창에 '니트(NEET)'를 검색해 봤다"고 말했다. 금전적 문제로 외부 활동에 자신감이 점점 떨어졌지만, 고립청년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무업 청년들을 위한 가상회사 '니트생활자'에서 쉬었음 청년들과 교류하며 일상의 리듬을 되찾고 있다.
1년 9개월여 실업자와 쉬었음 상태를 오간 한영석씨가 올해 3월 24일 인천 서구 한 카페에서 본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영석씨는 이달 중순 지방의 한 공공기관에 취업해 쉬었음의 굴레를 끊었다. 인천=이유지 기자
제각각 사연이 있지만 청년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쉬었음은 증상일 뿐, 병의 근원이 아니"라고. 복합적인 한국 사회 문제가 얽혀 만들어진 현상이라 증상만 완화하는 건 소용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자발적 쉬었음은 일자리 미스매치에 추세적으로 늘어왔으나, 최근엔 경기 영향도 커졌다. 1년간 증가한 청년층 쉬었음에서 자발적, 비자발적 쉬었음 기여율은 각각 28.2%, 71.8%였다. 퇴사 후 1년만 지나도 근로희망 비율은 90%에서 50%로 꺾인다.
그럼에도 영석씨는 1년 9개월 만에 실업자와 쉬었음을 오가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고 없는 곳의 공공기관이지만 지난한 구직 터널을 통과한 데 감사한다. 그는 "주변을 보니 비자발적 쉬었음이 됐다가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학령기부터 경쟁만 해왔기에 취업시장에서 밀려나면 좌절감이 더 크고 뭘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시장 개선과 함께 지친 청년이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게, 취업 의지가 꺾이지 않게 돕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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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314520002493)
인천·세종=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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