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바람계곡의>

[김상목 기자]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

ⓒ 대원미디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우시카'가 돌아온다. 첫 상영이 1984년, 한참 늦은 국내 개봉이 2000년이니 거의 두 세대 전 작품이다. 일본 대중문화 금지 시절에 '어둠의 경로'로 본 이들은 50~60대를 바라볼 나이다. 정식으로 극장에서 관람한 이들도 40대 전후다. 근래에 봤다면 OTT 스트리밍 서비스일 테니, 접하는 경로만 따져도 제각기 결이 다를 법하다. 우리 시대의 '고전', '클래식'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이 작품은 국내 관객에겐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징이자, 디즈니에 비길 유일한 존재라 할 '스튜디오 지브리'를 탄생케 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미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 등 개성 넘치는 작품의 연출을 맡았지만, 고용 신분에 그쳤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영혼의 동료 타카하타 이사오 등이 합심해 작가적 비전을 구현할 '꿈의 공장'으로 지브리를 출범하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얻은 흥행과 비평 양쪽 모두의 성공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래서 실제론 지브리 제작이 아님에도 해당 작품은 훗날 스튜디오의 기원으로 누구나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런 애니메이션이 첫 개봉 25년만에 돌아왔다. 향수와 추억을 능히 자극할 만하다.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대표작을 반갑게 맞이할 이들도 상당할 테다. 하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성기를 수놓은 여러 작품 중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의 진정한 창세기이자, 동시에 묵시록에 대응하는 평생의 고민까지 응축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길게는 텔레비전 시리즈인 1978년 <미래소년 코난>부터 2023년 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는 일관된 주제의식은 이미 본 작품에서 확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좀 과장하자면, 거장의 작품 연보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에 담긴 의도가 다채롭게 변주된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대체 탄생한 지 40년이 훌쩍 넘은 이 작업에 무엇이 압축되어 있길래 그럴까.

황혼의 시대를 사는 인류의 풍경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

ⓒ 대원미디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수천 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살던 고대 인류는 눈부신 산업 문명을 일으켜 수백 년 만에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이 개발한 고도의 과학기술은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핵무기, 불로불사의 인공생명, 인간의 수명을 마음대로 연장하는 생명공학 수준에 도달했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도전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결과로 지구 자연은 오염되고,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전쟁으로 치닫는다. '불의 7일'이라 불린 전 지구적 전쟁에서 인류가 만든 최종병기, '거신병'은 온 세상을 불태우고 문명을 멸망시킨다.

멸망 후에도 여전한 고대 문명의 잔재인 환경 오염은 세상 곳곳을 '부해(腐海)'라는 거대한 숲으로 뒤덮는다. 부해는 유독한 포자를 내뿜어 인간은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이곳엔 온갖 거대한 생물이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부해가 점점 곳곳을 잠식하자 잔존 인류의 터전은 점점 축소되는 중이다. 몇 번이고 인류는 고대 기술을 되살려 부해를 불태우고 터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부해를 지배하는 '오무'라는 거대한 존재가 분노해 국가를 멸망시키고 마을을 파괴한다. 오무의 분노를 피하는 것외엔 방법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바닷바람 덕분에 부해에서 날아오는 포자의 위협을 면한 바람계곡은 목가적인 공동체를 이뤄 소박하게 살아가는 변경의 소국이다. 부족의 공주 나우시카는 바람을 잘 타고 부해의 위험한 존재를 이해하려 애쓰는 소녀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안온한 일상을 보낸다. 부해의 독기가 서서히 그들의 건강을 빼앗지만, 자연의 섭리라 여기며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갑자기 멀리 서쪽에 있는 군사국가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바람계곡에 추락한다. 나우시카는 필사적으로 인명구조에 나서지만, 이미 가망이 없다. 사슬로 포박된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또래 소녀는 비행선에 실린 화물을 반드시 불태워야 한다고 부탁한 뒤 죽는다. 곧이어 화물을 회수하러 온 토르메키아 군대에 바람계곡은 삽시간에 점령당하고, 나우시카와 주민들은 원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릴 운명이다. 화물은 아주 위험한 존재로, 어쩌면 인류의 존속을 위협할지 모르는 비밀을 숨긴 존재임이 조금씩 드러난다.

대의를 농축한 작업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

ⓒ 대원미디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이미 <미래소년 코난>부터 자신이 고민하던 인류의 미래와 지구 환경에 관한 지대한 염려를 피력했던 감독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한층 더 확장된 고민을 펼치기에 이른다. 구 인류를 파멸에 이르게 한 "불의 7일"은 냉전 종식 후 너무나 무덤덤해진 21세기 우리로선 체감하기 힘들 만큼 핵전쟁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던 1980년대 초중반, 양식 있는 이라면 누구나 걱정하던 불안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인류가 스스로 자멸에 이르게 할 거대한 파괴력을 손에 넣었지만, 이를 슬기롭게 관리할 역량은 미지수인 상태에 직면한 것이다. 게다가 우발적 핵전쟁은 이미 가상이 아닌 실체적 공포로 자리한 지 오래였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핵전략사령부>, <해변에서>, <그날 이후> 같은 고전 SF 영화, 그래픽 노블과 영화를 넘나든 걸작 <바람이 불 때>와 <왓치맨>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당시 느끼던 핵전쟁과 종말에 관한 공포의 흔적은 대중문화 곳곳에 남아 있다.

게다가 급격한 산업화 결과는 전대미문의 물질문명 수혜를 낳았지만, 반대급부로 전 지구적 환경 재앙을 초래했다. 여태껏 파괴적 후유증을 예상하지 않고 저질러댄 환경 파고의 참혹한 실상이 드러나고, 수많은 생물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한 데 자성이 일어났다. 그린피스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에 경각심을 가진 시민들의 사회운동이 번진다. 1968년혁명 이후 녹색당을 비롯한 생태정치가 서구에선 중요한 정치적 변화로 받아들여진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조국 일본 역시 그 흐름 안에 있었다.

여기에 일본이 가진 중요한 차별점이 추가된다. 전범국인 동시에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피폭국이란 오명이다. 남들은 간접 체험한 핵전쟁의 공포를 생생한 자기 경험으로 간직한 나라에서 태어난 이들은, 기성세대가 초래한 전쟁과 파괴의 재앙에 의문을 품고 저항하며 청춘을 보냈다. 감독 역시 반전운동과 애니메이션 업계 내 불공정 관행에 맞선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게다가 전후 경제부흥 과정에서 미나마타병 같은 공해병 사건이 거대한 반향을 불러왔다.

과연 일본은, 인류는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단순히 먼 미래 전망이 아니라 존속을 위해 내려야만 할 결단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그런 시대상 및 문화예술인이 자신의 시대를 체험하며 응시한 결론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1단계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나우시카'에서 '모노노케 히메'로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

ⓒ 대원미디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실은 애니메이션보다 만화로 먼저 출발한 작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체기에 새로운 도전으로, 완성기한이 규정된 애니메이션보다 상대적으로 재량이 부여된 연재만화를 시도했다. 고급 만화를 수록하던 잡지 '아니메쥬'에 1982년부터 연재한 동명의 만화 중 단행본 1권과 잡지 추가 연재분을 조합해 1차 완결로 선보인 게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인 셈이다.

이후 전성기를 맞이한 스튜디오 지브리 일정 때문에 자주 중단되긴 했지만, 나우시카 이야기에 애착이 컸던 감독은 꾸준히 연재를 이어갔다. 만화는 12년 만인 1994년에 전 7권 단행본으로 완결되기에 이른다. 애니메이션에선 다소 급하게, 그리고 전형적인 영웅전설처럼 마무리한 이야기는 장대한 대하 서사시로 변모해 있었다. 설정 역시 애니메이션에선 단선적이던 게 몇 곱절 더 심화하고 복잡해졌다.

사실상 애니메이션 판이 아이와 부모가 함께 환경 문제를 가미한 명작 동화를 보는 기분이었다면, 만화 전집은 그야말로 <반지의 제왕> 급 규모와 함께 각자의 정의와 명분을 갖고 대립하는 거대 세력의 암투, 세계의 운명을 건 가치관의 충돌과 선택의 고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둘은 기본 설정과 등장인물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이야기라 봐도 무방하다는 분석이 적잖게 등장할 정도다.

애니메이션은 1984년에 공개되었지만, 이후 계속 연재되던 만화의 영향력은 절대로 듸쳐지지 않았다. 이후 지브리의 전성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와 동료 타카하타 이사오가 선보인 명작들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만화 판의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 있었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할 과학기술과 파괴병기에 관한 경고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거대 세력의 각축에서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는 소박한 개인은 <붉은 돼지>에서, 환경파괴로 쫓겨나는 비인간 존재의 슬픔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가슴 아프게 그려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만화의 끝과 통하는 작업이라면 역시나 1997년 <모노노케 히메>를 들 수 있겠다.

애니메이션은 나우시카란 존재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 가능하리란 희망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후로도 세상은 감독의 염원대로 개선의 전망을 보이지 못했다. 감독은 어쩌면 자신이 품었던 희망이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닐까 고심하고 좌절하길 거듭했을 테다. 그러나 회의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서로 부딪히고 대화하며 살아내야 하는 운명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그 난해한 무제에 관한 감독의 대답이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그리고 (국내에도 출간된) 7권짜리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 애니메이션을 재발견한다면, 마땅히 만화까지 도달해 온전한 작가의 비전을 목격하길 권하는 이유다.

<작품정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風の谷のナウシカ 
Nausicaä of the Valley of the Wind 
1984｜일본｜애니메이션, 어드벤처, SF, 판타지 
2025.06.25. (재)개봉｜116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 미야자키 하야오 
PD 타카하타 이사오 
음악 히사이시 조, 호소노 하루오미 
수입 대원미디어 
배급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

ⓒ 대원미디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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