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포커스]
승패보다 스토리… 스포츠 다큐 시대2025년 5월 24일 모나코 몬테카를로 서킷에서 열린 모나코 F1 그랑프리 경기 모습./
포뮬러 원(F1)은 유럽에서 태어난 귀족 스포츠였다. 페라리, 맥라렌, 메르세데스 등 이름만으로도 유산처럼 들리는 팀들이 대회를 주름잡았다. 그런데 최근 유럽 전유물이던 F1이 미국 본류로 진입하고 있다. 한때 ‘자동차 경주’ 하면 나스카나 인디500만 떠올리던 미국에서, 이제 라스베이거스 밤거리를 가르는 F1 머신이 상징이 됐다. 닐슨 스포츠는 “미국 내 F1 팬 수가 지난해보다 10.5% 증가해 5200만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2021년만 해도 미국에서 F1 그랑프리는 연 1회였다. 지금은 오스틴,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세 곳에서 열린다. 24개 그랑프리 대회 중 최다 개최국이 미국이다.그래픽=이철원
이 변화를 이끈 건 타이어도 엔진도 아닌, 콘텐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본능의 질주(Drive to Survive)’는 카레이서들의 갈등과 욕망, 벼랑 끝 승부의 풍경을 드라마처럼 보여줬다. 2019년 첫 시즌 이후 미국 내 평균 시청자는 54만명에서 117만명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소셜미디어 팔로어 수는 1200만명에서 9600만명, 여성 팬 비율은 8%에서 40%로 올라갔고, 팬 평균연령은 36세에서 32세로 내려갔다. 이 드라마는 시청자만 늘린 게 아니라, 팬 성격 자체를 바꿔 놓았다.넷플릭스 '본능의 질주'
‘스포츠 다큐멘터리’ 장르는 단순한 경기 요약이 아니다. 선수의 삶과 선택, 승패 너머 서사를 담는다. 승부는 짧고, 이야기는 길다. OTT란 신규 플랫폼이 그 공간을 활짝 열었다. ‘쿼터백(미식축구)’ ‘풀 스윙(골프)’ ‘브레이크 포인트(테니스)’ ‘스프린트(육상)’ 같은 작품들이 나오면서 그 종목이 가진 지평선도 넓어졌다. 그 종목에 빠진 사람들만 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던 계층까지 포괄하는 전환을 이끌어냈다.
ESPN은 2020년까지만 해도 F1 중계권료로 500만달러를 냈지만, 지금은 연 9000만달러를 지불한다. 5년 만에 18배 상승했다. 콘텐츠가 스포츠 가치를 매기는 셈이다.
잉글랜드 5부 리그 프로축구 구단 렉섬 AFC의 변화는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가 2021년 이 팀을 인수한 뒤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된 다큐 ‘웰컴 투 렉섬’은 이 작은 구단 역사에 획을 그었다. 구단 소셜미디어 팔로어 수는 100만명 이상 늘었고, 웨일스 소도시 렉섬을 찾는 관광객은 전보다 3배가량 많아졌다. 구단 가치는 200만파운드에서 1억5000만파운드. 70배 이상 폭등했다. 축구를 본 사람보다, 축구 이야기를 본 사람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디즈니플러스 '웰컴 투 렉섬'
스포츠 다큐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은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다. 조던이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황금기를 그린 이 10부작은 코로나 기간 선보여 ESPN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운동화 브랜드(에어 조던)로만 조던을 알던 세대는 그 작품에서 ‘(농구의) 신이 된 인간’을 처음 접했다. 이후 ‘라스트 댄스’는 스포츠 사전에서 ‘마지막 혼신의 무대’를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로도 자리 잡았다.넷플릭스 '더 라스트 댄스'
NBA(전미 농구 협회)는 1998년 당시 500시간 분량의 조던 영상 자료를 촬영했고, 그의 허락 아래 20년 뒤 공개했는데 이 자료가 다큐 기본 골격이 됐다. 2004년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격적 우승 여정을 그린 ‘대역전(The Comeback)’도 MLB(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사무국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스포츠 스타들은 이제 경기만 뛰지 않는다. 자신을 기록하고, 각색하고, 연출한다. 르브론 제임스, 톰 브래디, 데이비드 베컴은 직접 자기 다큐를 만들었다. 2023년 넷플릭스 최다 시청 다큐 작품 ‘베컴’은 에미상까지 품었다. 스포츠 디지털 플랫폼 그린플라이는 “스포츠 스타는 이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브랜드 스토리텔러”라고 했다. 안준철 호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디지털 시대 스포츠 정보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게 됐다”며 “여기에 콘텐츠를 고를 수 있는 OTT 환경과 맞물려 스포츠 다큐가 각광받고 있다”고 설명했다.넷플릭스 '베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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