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휘둘리는 자원개발
'대왕고래 정치色' 빼겠다는 정부…전문가 "동해 5번은 뚫어봐야"
'대왕고래' 尹사업이란 이유로
산업부, 예산 신청조차 안해
日과 분쟁 남해탐사 예산 3배↑
정부가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알려진 동해 울릉분지 시추 탐사의 내년도 예산을 0원으로 책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일본과의 해상 분쟁 지역인 7광구 인근 남해 분지 탐사 예산은 대폭 늘렸다. 동해 울릉분지는 초기 탐사에서 유망성이 입증된 곳인데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띄운 사업이라는 이유로 후순위로 밀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 정부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 제안서에서 동해 시추 탐사 관련 정부 출자 예산은 0원으로 하고, 남해 지역의 예산을 예년보다 세 배 이상 늘린 71억5000만원으로 책정했다. 전체 유전 개발 사업 예산은 총 109억1000만원으로 정했다. 2023년 301억원, 2024년 481억원에 비해 크게 줄어든 규모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동해 분지에 대한 시추 탐사는 필요하지만 정치적 색채를 지워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신 남해 탐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본과의 ‘7광구 공동 개발 협정’이 올해 종료될 가능성이 커 남해에 깃발을 꽂는 게 중요해졌다는 판단에서다. 1978년 발효된 이 협정은 2028년 종료되는데, 양국 중 한 나라라도 원하면 종료 3년 전인 오는 22일부터 협정을 일방적으로 끝낼 수 있다. 이 경우 7광구 관할권을 놓고 한·일 간 신경전이 벌어질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이에 따라 7광구 접경 지역인 남해 6-2광구, 5광구의 탐사 예산을 우선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해 지역 개발 예산은 애초에 신청조차 하지 않아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속성이 핵심인 자원 개발이 정권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해 ‘대왕고래 프로젝트’ 시추선 웨스트카펠라호
동해 울릉분지 탐사 예산 '전액 삭감' 논란
남미 광구 1달러에 산 엑슨모빌, 탐사 지속…1년 만에 유전 대박
유럽계 에너지기업 셸은 2009년 미국 엑슨모빌과 함께 가이아나 스타브룩광구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분을 50%까지 확보했지만, 초기 탐사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단해 2014년 엑슨모빌에 광권을 1달러에 넘기고 철수했다. 탐사를 이어간 엑슨모빌이 이듬해 리자-1 유전을 발견하며 상황이 급반전했다. 남미 최빈국이던 가이아나는 매장량 17위 산유국으로 단숨에 도약했다.
자원 개발 전문가들은 15일 “가이아나 사례는 초기 성과가 미미하더라도 개발을 이어간 국가와 기업이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동해 울릉분지처럼 상업성이 입증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꾸준한 탐사가 필요한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정치 쟁점화한 자원 탐사
정부는 지난해 6월 동해 울릉분지에서 ‘대왕고래’ 등 유망 구조 7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국내 해역에서 유전과 가스전을 찾기 위한 중장기 탐사 계획인 ‘광개토 프로젝트’에 따른 성과였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이들 유망 구조의 지질학적 탐사 성공률(지코스·GCOS)은 18~20%로, 가이아나 리자-1 유전의 16%보다 높은 수치다.
하지만 이 결과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전격 발표한 게 화근이 됐다. 자원 탐사가 정치 쟁점화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왕고래는 윤석열 정부의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공격했다. 올해 예산으로 편성된 정부 몫 1차 시추 예산 497억원을 전액 삭감하기도 했다. 이에 산업자원부가 동해 분지의 정치적 프레임을 희석하기 위해 내년 예산을 0원으로 책정한 것이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20%의 성공 확률을 도출할 때 가정한 8개 요소가 있다”며 “시추를 통해 이들 가정이 적절했는지 검증해야 할 시점인데, 정치적 논란으로 탐사가 중단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원 안보 측면에서 꾸준한 개발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시추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서라도 더 뚫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이 확보한 시추공 데이터는 작년 말 기준 각각 4만8000개, 800개에 달한다. 한국이 가진 시추 이력은 70개가 채 되지 않는다.
◇남해, 동해보다 매장 가능성 낮아
정부는 이달 말 예정된 동해 분지 광권 입찰에서 해외 메이저 기업이 참여하면 이를 명분 삼아 예산을 추가 편성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 앞바다 탐사를 외국 기업 응찰 여부로 결정하겠다는 뜻이어서 여전히 비판 여지가 크다. 김윤경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예산 편성 등으로 일정 부분 리스크를 분담해야 민간 기업도 참여할 여지가 생긴다”며 “한국석유공사가 회사채 발행 등으로 자체 자금을 조달해 동해 분지 탐사를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예산을 대폭 늘린 남해 분지(5광구, 6-2광구)에 대해 동해 분지와 비교해 유망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오는 22일부터 한·일의 일방적인 공동 개발 협정 종료 통보가 가능해진 7광구에 대한 ‘깃발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근 5광구 등의 집중 탐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병엽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에너지자원개발본부장은 “석유 매장 가능성은 유기물이 축적된 두꺼운 퇴적층이 있느냐에 달렸는데 5광구 등은 중국이 유가스를 생산하는 시후분지의 가장자리에 살짝 걸치는 정도라 이론상 매장량이 충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석유 개발 목적에선 유망성이 낮더라도) 탄소포집저장(CCS) 등 기후 대응 인프라로는 여전히 의미 있는 탐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