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정통부 장차관 하마평도 '깜깜이'
이재명 정부 출범 10일째인 가운데 5년간 국정 청사진을 그릴 정부 주요 인사에 '과학기술 전문가'가 눈에 띄지 않아 과학기술 정책이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재명 정부가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지 10일째다. 대선 과정에서 언급했던 특검과 민생경제 관련 발빠른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과학계에서는 5년간 국정 청사진을 그릴 정부 주요 인사에 '과학기술 전문가'가 눈에 띄지 않아 과학기술 정책이 소외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가 인공지능(AI) 정책에 집중하면서 지난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크게 위축된 기초과학 생태계 복원 문제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보다 시급한 사안이 많아 차분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후보 시절 성장의 주요 축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제시했던 만큼 구체적인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정부가 민생 회복, 외교안보, 각종 특검 등 주요 현안 해결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뚜렷하게 주목받는 과학기술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과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과학기술 어젠다를 제시할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부처 장차관과 달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장차관 하마평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16일 출범하는 이재명 정부의 국정 로드맵을 짜는 '국정기획위원회' 위원장과 위원으로 거론되는 인사에도 외교나 법률 등 전문가는 포함됐지만 과학기술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출신의 우주 과학자인 황정아 의원(더불어민주당 과학기술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이 포함될 것으로 보이지만 초선 의원 1명으로 과학기술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기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이와 함께 사실상 인수위원회 역할을 할 것으로 여겨지는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기후에너지부' 신설 등을 포함한 정부 조직법 개편도 논의될 예정이다. 전세계적인 기후위기 대응, 에너지 관련 정책 등에 방점을 찍고 정부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 등은 기초원천 과학 연구개발(R&D)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진행된 R&D 정책의 연속성·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기정통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과기계 한 관계자는 "지난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관련 정책에서도 과학자나 과학기술 분야 정부 컨트롤타워인 과기정통부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과학기술 정책이 소외되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정부 한 출연연구기관 원장은 "정부가 진행하는 업무 순서가 있겠지만 현재로서 국정기획위원회에서 과학기술분과가 없고 과학기술수석이 사라지고 과기정통부 장관 하마평도 크게 나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학기술을 키워 기술 패권을 잡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 읽히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출연연 원장은 "대선 시절 'K-이니셔티브 위원회' 등이 제시했던 국정 기획이 실질적으로 정부 운영에 반영되도록 이끌 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수의 과학기술 전문가가 참여한 K-이니셔티브 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직속 기관이었다.
과학특성화 대학에 재직중인 한 교수는 "여러 이슈에 밀려 대선 때부터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문재인 정부 때 국정기획위원회 역할을 했던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있었지만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과학기술 전문가가 호원경 전 서울대 명예교수 1명뿐이라 과학기술 공약을 국정 과제로 반영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정부에 과학기술 전문가가 여럿 포진해야 힘 있게 과학기술 정책을 끌고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이슈가 AI에 매몰될 위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출연연 원장은 "정부가 AI 투자 100조원 시대를 통해 AI 3대 강국 도약을 구호로 내걸고 있지만 AI 1, 2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AI 기술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에 3대 강국이라는 키워드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며 "AI뿐 아니라 다른 중요한 과학기술 이슈도 많기 때문에 이슈의 균형을 잘 맞춰 종합적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끌고 나갈 전문가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최소 20조원 이상으로 예상되는 2차 추경에는 1차 추경에 이어 AI 인프라 확대 예산이 과학기술 이슈 중 유일하게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추경에도 AI 관련 예산이 주로 담겼다. 또다른 과학계 관계자는 "AI 정책은 과학기술 정책이 아니라 산업·경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며 "중장기적인 과학기술 정책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 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기초과학 생태계 복원을 주도할 과학기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다. 기초과학 생태계는 지난 정부의 R&D 예산 삭감 여파로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이광오 공공과학기술연구노조(과기연구노조) 정책위원장은 "윤석열 정부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카르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연구자들이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연구계를 이탈하는 등 생태계가 많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경제문제만큼 과학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다"며 "R&D 현장을 잘 이해하고 있고 자신의 소신과 현장의 요구를 정부에 잘 전달하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현재 경제단체, 대기업 등이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며 경제 이슈를 지속적으로 정부에 전달하고 있지만 기초과학 분야는 시급한 현안이 많음에도 목소리를 낼 창구가 많지 않은 상황이다"며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정부가 과학기술의 핵심인 기초과학 분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장기적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잘 짤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을 차분히 찾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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