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르 세계 1위 펜싱 대표 전하영전하영은 몸을 풀 때 이매진 드래곤스 노래 '빌리버'를 듣는 게 자기만의 루틴이다. "늘 겸손하고 성실한 선수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신현종 기자
펜싱 국가대표 전하영(24·서울시청)은 올해 어린이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FIE(국제펜싱연맹)가 발표한 여자 사브르 세계 랭킹에서 그는 생애 첫 1위 고지를 밟았다. 전날 서울 SK텔레콤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하고 고향 대전에 내려가 집에서 용전중 펜싱부 동기들과 ‘떡볶이 파티’를 열어 소박하게 자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1위가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천선수촌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로소 감흥이 벅차올랐다고 했다. “핸들을 잡은 채 신나는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는데… 그제야 ‘세계 1위라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구나’ 싶더라고요.”그래픽=이철원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전하영 랭킹은 거침없이 치솟았다. 올림픽 당시 13위였던 그는 지난해 11월 알제리 오란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따낸 데 이어 12월 프랑스 오를레앙 그랑프리를 제패했다. 이어 안방에서 열린 SK텔레콤 그랑프리까지 정복하면서 한 시즌 개인전 3회 우승이란 생애 최대 성과를 거뒀다. “보통은 8강 문턱에서 좌절하고, 4강 갔다가 또 떨어지고…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짧은 시간에 금메달을 세 번이나 딴 거라 얼떨떨해요.” 고속 질주는 방심을 부를 수 있는 법. 6일 선수촌에서 만난 전하영은 “숙소 방에 ‘정신줄 하루라도 놓으면 끝장난다’고 써서 붙여 놓았다”며 웃었다.3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경기. (왼쪽부터) 윤지수, 전하영, 전은혜, 최세빈이 은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펜싱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된 건 지난 파리 올림픽. 평소 긴장을 모르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랑팔레(파리 올림픽 펜싱 경기장)에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고 했다. 개인전 8강전에서 대표팀 동료 최세빈(25)에게 10-4로 앞서다 14대15 역전패. 단체전 결승에선 마지막 주자로 나와 40-37로 앞서던 승부가 42-45로 뒤집히자 눈물을 삼켰다. 상대는 우크라이나의 ‘살아있는 전설’ 올가 하를란(35). 여자 사브르 올림픽 최고 성적인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호된 신고식를 치른 느낌이었다. “올가와 상대할 때는 주눅이 들어 ‘패닉’ 상태에서 싸운 것 같아요. 숙소로 돌아와 휴대폰을 열었는데 인스타그램이 ‘악플’로 도배가 됐더라고요. 펜싱을 시작하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역시 올림픽은 다른 무대구나 싶었죠.”
이후 자신의 펜싱 특장점을 돌아봤다. 큰 키(170㎝)와 파워를 앞세운 ‘선 굵은 펜싱’이 강점이라 그 스타일을 고수하고 싶었지만, 펜싱 흐름은 변화하고 있었다. “예전엔 마르세(앞발을 먼저 내딛고 뒷발이 따라오며 앞으로 이동하는 펜싱 기본 발 동작)를 크게 한 번 밟았다면 요즘은 그걸 쪼개서 짧고 빠르게, 3~4번에 걸쳐 나오며 상대를 흔드는 게 트렌드가 됐어요. 올림픽 이후 고집을 버리고 나서야 몸에 그 리듬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시작했어요.” 192㎝ 큰 키에 누구보다 섬세한 풋워크로 파리 올림픽 2관왕에 오른 ‘송촌고 선배’ 오상욱 움직임이 그에겐 길잡이가 됐다. 이국현 여자 사브르 대표팀 코치는 “전하영이 경험이 쌓이면서 상대 공격을 흘리고 되받아치는 ‘콩트라 아타크(Contre-Attaque·역습)’가 한층 더 정교해졌다”고 말했다.6일 진천선수촌에서 펜싱 여자 사브르 전하영 선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도쿄 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파리 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주역 윤지수(32)가 은퇴하면서 여자 사브르 대표팀에도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최근에는 김정미(25)가 새로운 맞수로 떠올랐다. 전하영은 그를 “너무 유연해서 연체동물 같다. 스타일이 또 달라 좋은 자극이 된다”고 표현한다. 김정미는 지난달 국가대표 선발전 준결승에서 전하영을 15대11로 꺾었다. 2000년생 김정미와 최세빈, 2001년생 전하영 등이 포진한 여자 사브르 대표팀은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나아가 2028 LA 올림픽을 금빛으로 물들일 ‘황금 세대’로 기대를 모은다. 올림픽 3연패(連覇)에 빛나는 ‘어펜저스’ 남자 사브르 대표팀처럼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펜싱 경기장은 ‘피스트(piste)’라 불린다. 길이 14m, 폭 1.5m 공간에서 최대 105㎝ 칼(사브르)로 상대를 먼저 찌르거나 베어야 이긴다. 이번 달 아시아선수권, 다음 달 세계선수권을 앞둔 전하영은 “아직도 피스트에 서서 이름이 불리면 심박수가 140 이상(성인 평균은 60~100)으로 치솟는다”면서도 “무대에 선 연극 배우가 그렇듯 이제는 긴장을 다스려 칼끝에 힘을 실을 수 있게 됐다. 올림픽이란 무대가 날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니 다음 도전이 더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6일 진천선수촌에서 펜싱 여자 사브르 전하영 선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사브르·플뢰레·에페
펜싱은 사브르·플뢰레·에페로 나뉜다. 사브르(sabre)는 머리와 양팔을 포함한 상체만 공격할 수 있는데 찌르기와 베기가 모두 가능하다. 플뢰레(fleuret)는 오직 검 끝으로 몸통을 찔러야 득점이 인정되며, 에페(épée)는 검 끝으로 몸 전체를 공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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