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검찰·법원은 ‘트럼프 사법 리스크’ 어떻게 해소했나
지난해 5월 30일 미국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열린 ‘성추문 입막음’ 혐의 재판에 출석, 피고인석에 앉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배심원단은 당시 전직 대통령 신분이었던 트럼프의 34개 혐의 전체를 유죄 평결했다./로이터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의 대장동 사건을 심리해 온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가 10일 기일을 추후 지정한다고 밝히면서 재판이 무기한 중단됐다. 앞서 전날엔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가 같은 결정을 내렸다. 현직 대통령이 기소된 형사 사건이 중단 또는 종료되면서 ‘사법 리스크’를 벗은 사례는 최근 미국에서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네 건의 사건으로 기소돼 있었지만, 당선 후 검찰·법원의 판단으로 사건이 사실상 종료됐다.
한국 법원은 결정에 대해 ‘(대통령의 불소추권을 규정한) 헌법 84조에 따른 조치’라는 짧은 설명만 붙였다. 반면 미 검찰과 법원은 국민들이 열람 가능한 (기각) 신청서와 판결문을 통해 이런 결정을 내린 취지와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대통령 사건에 대한 재판 중단을 계기로 미 검찰과 법원이 트럼프의 사건에 대해 내린 결정의 판단 근거와 취지를 분석했다.
그래픽=박상훈
◇대통령 직무 vs 법치주의의 원칙
트럼프는 2023년 4월 개인 변호사를 시켜 자신의 추문을 폭로하려는 성인물 배우에게 ‘입막음’ 돈을 불법 지급한 혐의로 뉴욕 맨해튼 지방검찰에 기소된 것을 시작으로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및 지지자 의사당 폭동 선동’ ‘백악관 문서 무단 유출’ ‘조지아주 대선 결과 바꾸려 외압’ 등 혐의로 잇따라 기소돼 형사 재판 네 건의 피고인이 됐다. 이 중 수사 지휘 검사장과 특별검사의 불륜 의혹이 불거지면서 수사 동력을 잃고 흐지부지된 조지아주 외압 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건은 검찰과 법원의 판단을 통해 사건이 사실상 종료됐다.
대선 20일 뒤인 지난해 11월 25일 잭 스미스 당시 연방 특별검사는 자신이 맡은 ‘백악관 문서 유출’과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및 의사당 난입 선동’ 사건에 대해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에 ‘소송 기각 신청서’를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스미스 특검팀은 공개된 21쪽짜리 기각 신청서에서 “법무부와 이 나라 모두 형사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했다.
특검은 “이런 상황으로 인해 두 가지 중요한 국가 이익(national interests)이 충돌한다”고 했다. 국가의 이익 수호와 관련한 원칙 둘이 충돌한다는 뜻이다. 첫째는 ‘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중대한 직무를 수행함에 과도하게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특검은 “대통령은 독특한 위치에 있고 최고의 재량과 민감성이 요구되는 정책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1982년 연방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제시했다. 둘째 원칙은 “미국에 법 위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로 요약된 ‘법치주의’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가 맞붙는 상황에 특검팀은 ‘직무 수행’에 무게를 더 두고 ‘기소 취하’ 결론을 내렸다.
◇닉슨·클린턴처럼 ‘재판 부담’ 덜어주기로
특검은 과거 사례를 판단의 구체적 근거로 들었다. 1973년과 2000년에 나온 법무부 법률고문실(OLC) 판단이다. OLC는 1973년 정치적 반대 세력을 불법 도청하려다 적발된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의 핵심 인물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에 대한 사법 처리 여론이 높아지자 의견서를 냈다. 로버트 G 딕슨 주니어 당시 차관보가 작성한 의견서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기소는 권력 분립 원칙을 침해해 대통령 직무 수행에 과도하게 간섭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닉슨은 이 의견서에 근거해, 사법 처리되지 않고 자진 사임 형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0년엔 OLC가 성 추문 관련 위증 혐의를 받아 탄핵 위기를 겪은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기소 여부를 검토했다. 의견서는 “현직 대통령 기소 및 기소 후 유죄 확정까지 과정은 헌법에 규정된 권력 분립 원칙을 부당하게 위협한다”고 했다. 특검팀은 당시 OLC가 제시한, 대통령 신분으로 재판을 받을 때의 세 가지 문제점을 거론했다. ①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구금의 부담’이 생기고 ②기소돼 재판을 받는다는 ‘공적인 낙인과 비난’에 대한 부담으로 지도자 역할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며 ③재판 방어 준비로 정신적·신체적 부담이 발생해 대통령직 수행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대통령 임기 종료 후 재기소 여지 남겨
특검팀은 OLC를 인용해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도 재판이 지속되면 국정 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빚어 결과적으로 권력 분립의 원칙을 훼손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직무를 제약 없이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헌법적 이익”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한편으론 트럼프의 대통령직이 끝난 후 재기소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특검팀은 “2020년 OLC는 현직 대통령 면책이 일시적이고 재임 동안만 적용되기 때문에 ‘법치주의’ 유지를 위한 중대한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했다”며 “이런 형태의 면책이 형사 재판을 기각시키는 게 아니라 연기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특검팀은 ‘기각하되, 재기소는 가능한 방식’으로 기각을 요청했다. 트럼프가 4년 임기를 마치면 이 사건이 언제든지 살아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법치주의의 원칙을 놓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 법원 “처벌은 안 하지만, 유죄는 맞다”
트럼프의 재판 중 가장 먼저 시작된 성인물 배우 입막음 사건의 경우에도 재판장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사건을 종료했다.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앞둔 지난해 5월 뉴욕 맨해튼 법원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내렸다. 배심원단이 평결을 하면 판사가 이를 참고해 형량을 포함한 최종 선고를 해야 하는데, 선고 날짜는 지난 1월 10일로 잡혔었다. 트럼프 취임 열흘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을 심리한 후안 머천 판사는 ‘유죄이되 무조건 석방’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징역형·벌금·보호관찰 등의 법적 처벌이 따르지는 않지만 ‘트럼프는 죄를 지었으므로 유죄’라는 점을 확실히 한 것이다. 머천 판사는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라는 점이 범죄의 심각성을 줄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 권한이) 배심원 평결을 지울 수도 없다”고 하면서도 “(대통령 직무 수행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건 없는 석방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대통령직 수행을 고려해 물리적 처벌은 하지 않았지만, 배심원단이 내린 ‘유죄’ 평결의 취지는 살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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